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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boran Jul 23. 2021

<sound and scent> 피아노




아홉 살 때까지 외동딸이었던 나의 첫 번째 오랜 친구는 피아노다. IMF가 이 나라를 덮치기 전까지 부모님은 경양식 레스토랑을 운영하셨는데, 어린 나이에 가게 한 편에 혼자 앉아 순풍산부인과만 보고 있는 내가 안쓰러워 음악학원에 보내기로 결심했다고 들었다. 가게랑 학원은 다섯 살의 짧은 다리의 도보로도 5분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그 학원은 스물일곱의 윤 선생님 한 분이 계시는 소담한 공간이었다.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에 늘 갓 마른 빨래 냄새가 나던 윤 선생님. 나는 그의 지도하에 피아노를 처음 접했다. 


짤막한 다섯 살의 손가락보다도 훨씬 두껍고 무겁던 피아노 건반. 윤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힘 있게 꾹꾹 누르면 웬만한 사람의 목소리보다 아름다운 소리가 손가락 끝에서 피어올랐다. 약 열 평 남짓 했던 상주 피아노 학원. 그곳에 계셨던 윤 선생님은 피아노에 이은 나의 두 번째 친한 친구였다.


내가 건반 위에 볼을 기대고 잠이 들면 선생님은 나를 업고 5분 거리에 있던 엄마 아빠의 가게에 나를 데려다줬다. 선생님에게 못생겼다고 놀리기를 좋아하는 괴팍한 다섯 살 보란. 선생님은 그런 나에게 거의 매일 편지를 써줬는데, 그것은 윤 선생님의 월급에 포함되지 않은 행위였다. 고로 선생님의 편지는 의무나 노동이 아닌 나에게 주는 사랑이자 선물이었다. 매일같이 쌓이던 윤 선생의 편지들은 내가 아끼던 노란 박스에 가득찰 만큼 모이게 되었다. 머지않아 IMF를 맞은 우리 가족은 엄마의 고향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나는 그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고 윤선생님은 나를 보며 엉엉 울며 작별 인사를 했다.


"보란아! 이사 가서도 피아노 많이 쳐야 해."

"네!"

선생님의 마지막 말씀이었다. 


이사하던 날, 엄마는 나에게 물었다.

"마산 가면 피아노 학원부터 등록해줄까?"

나는 대답했다.

"아니?"


나는 그렇게 나의 첫 번째 친구와 두 번째 친구를 까마득히 잊은 채 재미있는 십 대를 보냈다. 그리고 이십 대가 되었다. 어느 명절에 큰집에서 받아온 신디사이저(*신시사이저)는 고장이 난 지 오래였고 나는 그것이 고장 났다는 사실에 큰 관심이 없었다.


스물두 살이 되었을 무렵, 작은 이모네에서 별안간 피아노 선물을 주셨다. 사촌 동생인 해정이 해빈이가 통 손을 대지 않아 작은 이모네에서의 피아노는 애물단지가 된 모양이었다. 그렇게 약 1n년 만에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려 보았다. 내 손가락은 더 길고 굵어졌고, 이모가 주신 피아노는 전자 피아노여서 어릴 적 눌렀던 건반보다 훨씬 얇고 겉면에 윤이 났다.


나는 연주를 했다. 오랜 친구들과 노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 나는 노래들 중 연주가 가능할만한 음악들을 두 시간은 족히 치고 나서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그것도 잠깐의 일상일 뿐, 피아노 덮개는 열려 있는 시간보다 닫혀 있는 시간이 훨씬 길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윤선생님이 어릴 적 나에게 매일 같이 보내줬던 편지가 생각났다. 십몇 년이 지날 동안 열어 본 적 없었지만, 버렸을 리 없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아파트 창고를 열어 먼지가 폭폭 쌓인 노란색 뚜껑의 박스를 찾아냈다. 스물일곱 윤 선생님의 사랑이 한 자 한 자 꾹꾹 눌려 적혀 있었다.


- 사랑하는 보란이에게. 너는 왜 이렇게 사랑스럽니? 아마도 너는 내일도 모레도 사랑스러울 거야.

- 사랑하는 보란이에게. 오늘은 보란이가 선생님한테 소리를 지르고 울고 떼를 써서 선생님도 화가 났어. 선생님이 미안해. (중략) 내일 연습 다섯 번 다 하고 나면 선생님이 보란이가 제일 좋아하는 과자 두 개 줄 거야. 너는 내일 과자 선물이 있는 줄도 모르고 새근새근 자고 있겠지? 사랑해 우리 보란이.


피가 섞이지 않은 나의 첫 친구는 그렇게 나에게 매일 같이 사랑한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바쁜 엄마 아빠가 그 시절 자주 불러주지 못했을 내 이름을 누구보다도 여러 번 불러 준 윤 선생님이었다. 나는 묵혀둔 선생님의 따듯함을 단숨에 기억했다. 괜한 미안함과 울컥함에 편지들을 꾹꾹 접어두고 먼지가 폭폭 쌓인 피아노를 거듭 닦았다.


오랜만에 반짝 윤이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아 나는 어설픈 연주를 했다. 악기를 다루는 것은 그 종류나 실력에 상관없이 사람의 감정을 아름답게 발산시켜준다고 믿는다.


시간이 흘러 직장인이 된 나. 출근과 동시에 퇴근을 기다리는 이 무료한 업무 시간. 그 시절 윤 선생님이 매일 맡아야 했을 피아노 수업도 분명 그렇게 다르진 않았을 테다. 상주 피아노 학원에서 녹여낸 그의 노동은 지금의 내 노동처럼 똑같이 무료할 수는 있어도, 윤 선생님이라는 사람만큼은 달랐나 보다. 월급과는 전혀 상관없는 녹진한 애정을 매일 같이 들고 출근했던 그는 과연 어떤 청년이었을까. 어느새 상주 피아노 학원의 윤 선생님 나이가 된 나는 그를 느지막이 떠올려 본다. 상주 피아노 학원과 몇 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그녀의 목소리와 어린 보란이의 낡은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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