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락가락하는 장마철. 해가 날듯 말 듯 하더니 갑작스레 비를 뿌렸다. 그 길에 엄마와 남매가 자그마한 우산을 쓰고서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신호등을 건너며 엄마는 아들에게 “넌 태권도 학원으로 바로 뛰어가”라고 했다. 셋이서 쓰기에 우산이 작으니 목적지가 가까운 아들을 먼저 학원에 보내려는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남자아이가 발을 동동 구르면서 “아니 태권도 4시 반부터라고”하면서 울상을 지었다. 3시가 막 넘은 시간. 지금 태권도 학원에 가기에는 조금 이른 감이 있었다. 그전에도 엄마가 학원 시간을 착각한 적이 있는지 아이는 억울한 표정으로 발을 쾅쾅 굴렀다. 아이의 엄마는 “빨리 와”라며 자신 쪽으로 당겼던 우산을 다시 딸과 아들의 머리 위로 가만히 씌워주셨다. 왜 아이들은 억울하거나 화가 나면 발을 동동 구를까. 어릴 때 떼쟁이었던 나는 발을 굴리기보다는 주저앉아 엉엉 목 놓아 우는 쪽이었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초등학교 여름방학 때 고모네에서 머문 적이 있다. 대학생이었던 사촌오빠가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왔다. 경치도 좋고 집 앞에는 맑은 계곡도 흐르지만, 시골에서의 시간은 단조롭고 평화로웠다. 상냥하고 다정한 오빠는 나와 언니가 심심할까 봐 자전거도 태워주고, 언니와 둘이서는 갈 수 없는 먼 길까지 산책도 함께 가주었다. 그때 나는 고작 열 살. 시골길 산책보다 저녁이면 해주던 텔레비전 만화영화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고모네 텔레비전은 안방에 있었고 거기에 들어가 마음대로 채널을 돌릴 수 있는 용기는 없었다. 만화영화가 보고 싶어 엄마에게 말했더니 “고모부 보시잖아. 집에 가서 보고 언니랑 놀아”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우리 고모가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시누이 아닌가. “우리 딸이 보고 싶어 하니 만화영화를 보여달라”고 말하기는 어려웠을 거다. 입이 삐죽 튀어나온 나에게 오빠는 대신 자전거를 태워주거나 밤하늘의 별자리를 알려주었던 기억이 난다.
나랑 있는 게 좋아서 쓰는 거지?
언니 오빠와 잘 놀다가도 금세 토라져서 왕왕 울곤 했다. 언니 오빠랑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며 놀고 있는데 엄마가 방학 숙제도 안 하고 고모집에 와서 일기 쓰는 걸 못 봤다며 일기라도 쓰라고 일기장을 펼쳐주었다. 어릴 때 나는 일기 쓰는 걸 싫어했다. 쓰기 싫어서 뭉그적 거리는데 오빠가 자기 일기장을 들고 와서 우리 곁에 엎드렸다. 대학생이 일기를 쓴다는 게 너무 신기해서 오빠도 일기를 쓰느냐고, 학교에서 일기 검사하느냐고 물었더니 “가끔 기억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만 적는다”라고 했다. “나랑 있는 게 좋아서 쓰는 거지?”라고 물었는데 오빠는 더 이상 대꾸해주지 않았다. 대신 일기 쓰는 오빠를 몰래 지켜보다 내 이야기라는 걸 직감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오빠가 적은 내용이 아주 뚜렷하게 기억나는데 ‘어쩔 수 없는 아이’가 첫 시작이었다. 그걸 본 나는 오빠한테 "어쩔 수 없는 아이가 나 아니냐"라고 따져 물었고 오빠는 다른 사람의 일기 보는 거 아니라면서 조곤조곤 나를 타일렀다. 그걸 본 엄마에게 나는 아주 크게 혼이 났다. 곁에서 함께 일기를 쓰려던 오빠의 다정함이 대참사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때쯤 엄마에게 혼이 나는 게 일상이었던 나는 금세 잊었는데 오빠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는지 아이스크림을 사주며 나를 달래주었다.
어릴 때 떼쓰던 나를 떠올리다 보니 아이들이 억울하면 왜 발을 굴리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우는 아이 젖 준다’는 속담처럼 조용히 자신의 감정을 삭이는 아이보다는 왕왕 울면서 떼를 쓰는 아이를 먼저 달래려고 하기 때문이 아닐까. 아이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억울하거나 화가 나면 내 마음 좀 알아 달라고 발을 동동 굴린다. 아직 덜 자라 자그마한 발로 콩콩콩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