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글쓰기 수업과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멤버들이 한 권씩 추천하는 책을 같이 읽는다. 이번 주에는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었다. 한강은 5.18 광주 이야기를 다룬 <소년이 온다>를 쓴 후 어떤 꿈을 꾸었고, 칠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에 제주 4.3에 대한 이 책을 완성했다.
경하가 인선의 부탁을 받고 제주도로 한밤중에 눈 덮인 중산간을 헤치면서 인선이 집을 찾아가는 광경이 눈에 선하다. 아니 그 장면이 너무 강렬해 지금도 눈에 훤하게 그려진다. 두 마리 새 중 살아있는 한 마리를 살려달라는 인선의 부탁을 받고 제주도 인선이네 집을 찾아가는 여정 말이다. 인선 집에 도착했을 때 새는 이미 죽어 있어 나무 밑에 묻었는데 다시 새들은 살아나고 인선이 돌아와 같이 대화를 나눈다. 과거와 현재가 꿈인지 생시인지 들락날락하는 바람에 책장을 덮고도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 인선 어머니의 숨겨두었던 이야기.......
page 9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가 서 있는 벌판에 한쪽 커튼 야트막한 산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듬성이에서부터 이편 아래쪽까지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심겨져 있었다. 여러 연령대의 사람들처럼 조금씩 다른 키에, 철길 침목 정도의 굵기를 가진 나무들이었다. 하지만 침목처럼 곧지 않고 조금씩 기울거나 휘어 있어서, 마치 수천 명의 남녀들과 야윈 아이들이 어깨를 웅크린 채 눈을 맡고 있는 것 같았다.
묘지가 저기 있었나, 나는 생각했다.
이 나무들이 다 묘비인가.
page 23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그 벌판에 눈이 내린다. 우듬지가 잘린 검은 나무들 위로 눈부신 육각형의 결정들이 맺혔다 부스러진다. 발등까지 물에 잠긴 내가 놀라 뒤돌아 본다. 바다가, 거기 바다가 밀려들어온다.
언젠가 읽었던 <침묵>(일본 소설가 엔도 슈사쿠가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 상황을 다룬 역사소설)과 오버랩됐다. <침묵>에서 가장 잔인하게 느꼈던 것은 교인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바다 한가운데 몇 날 며칠을 묶어두는 형벌이었다. 밀물과 썰물이 번갈아 들고나면서 서서히 죽게 하는 형벌 말이다. 잔혹했다.
page 84
엄마가 어렸을 때 군경이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였는데, 그때 국민학교 졸업반이던 엄마랑 열일곱 살 이모만 당숙네 심부름을 가 있어서 그 일을 피했다고 엄마는 말했어. 다음날 소식을 들은 자매 둘이 마을로 돌아와, 오후 내내 국민학교 운동장을 헤매 다녔대.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와 여덟 살 여동생 시신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포개지고 쓰러진 사람들을 확인하는데, 간밤부터 내린 눈이 얼굴보다 얇게 덮여서 얼어 있었대. 눈 때문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으니까, 이모가 차마 맨손으론 못하고 손수건으로 일일이 눈송이를 닦아내 확인을 했대. 내가 닦을 테니까 너는 잘 봐,라고 이모가 말했다고 했어. 죽은 얼굴들을 만지는 걸 동생한테 시키지 않으려고 그랬을 텐데, 잘 보라는 그 말이 이상하게 무서워서 엄마는 이모 소맷자락을 붙잡고, 질끈 눈을 감고서 매달리다시피 걸었대. 보라고, 니가 잘 보고 얘기해 주라고 이모가 말할 때마다 눈을 뜨고 억지로 봤대. 그날 똑똑히 알았다는 거야. 죽으면 사람의 몸이 차가워진다는 걸. 맨 뺨에 눈이 쌓이고 피 어린 살얼음이 낀다는 걸.
page 311
뻐근한 사랑의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page317
그 겨울 3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 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 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이 섬에서 했던 그대로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 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휴전된 것뿐이었으니까. 휴전선 너머에 여전히 적이 있었으니까. 낙인찍힌 유족들도, 입을 떼는 순간 적의 편으로 낙인찍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침묵했으니까. 골짜기와 광산과 활주로 아래에서 구슬 무더기와 구멍 뚫린 조그만 두개골들이 발굴될 때까지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고 아직도 뼈와 뼈들이 뒤섞인 채 묻혀 있어.
그 아이들.
절멸을 위해 죽인 아이들.
page 328
2014년 6월에 첫 두 페이지를 쓰고 2018년 세밑에야 그다음을 이어 쓰기 시작했으니, 이 소설과 내 삶이 묶여 있던 시간을 칠 년이라고 해야 할지 삼 년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
몇 년 전 누군가 '다음에 무엇을 쓸 것이냐'라고 물었을 때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내 마음도 같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나는 제주 출신이지만 4.3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내 어머니한테 4.3 때 겪은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을 때
"산으로 가라 그러면 산으로 가고, 또 해안으로 가라 그러면 해안으로 가고 경했주게."
이 문장 단 한 줄이었다.
대학 때 잠깐 만났던 이는 고향이 중산간 마을이어서 가족 구성원이 4.3 때 희생되었다면서 가끔 4.3 대해 이야기했지만 나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영어에 'Elephant in the room' 이란 숙어가 있다. 방안에 코끼리가 있으면 엄청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코끼리를 투명한 것으로 취급하고 외면한다는 의미로, 분명히 인지하고 있지만 언급하기 원치 않는 문제 혹은 어려운 상황을 말할 때 쓰는 표현이라고 한다.
예전에 제주에서는 4.3이 바로 방 안 코끼리였다. 감히 언급해서는 안 되는 터부시 되는 단어였다. 왜냐하면 4.3에 대해 잘못 말했다가는 폭도로 몰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4.3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다. 그리고 나는 제주를 떠나 육지에서 30여 년 가까이 살고 있다.
이번에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함께 읽으며 한 친구는 <40년 만의 숙제>라는 제목으로 '1938년생인 어머니가 당시 11살 때 겪었던 제주 4.3 사건 이야기'를 써왔다. '어머니가 어린 시절 겪었던 4.3 이야기를 수백 번 들었건만 한쪽 귀로 흘려보내기만 했는데 이번에 다시 한번 그 기억들을 소환해서 글로 정리해 왔다'라고 했다. 그리고 '왜 아직도 어머니의 슬픔을 다 듣지 못하고 다 기록하지 못하는지 이제 그 질문에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라고 했다.
나는 한강 작가의 <이별하지 않는다>와 함께 현기영의 <순이삼촌>을 다시 한번 읽었다.
마을 사람들이 옴팡진 밭에 모여 총살당하는 순간 미리 기절해 쓸어져 버린 바람에 용케 목숨을 부지했던 순이삼촌, 그 트라우마를 어떻게 견뎌냈을까?
결국 삼십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순이삼촌은 바로 그 옴팜 진 밭 양지바른 곳을 골라 생을 마감했다.
<순이삼촌>
page 14
"아따, 팥죽이라 팥죽. 팥죽 쑤언 삼양 동네에 고렴감서." 광목 수건을 쓰고 눈이 짓무른 할머니가 구덕에 달린 질빵을 쥔 채 대답했다.
나의 어머니를 보는 듯하다. 예전 제주에서는 사돈집에 초상이 나면 팥죽을 쑤어가는 전통이 있었다.. 이걸 고렴 간다고 표현한다.
page 22
나이 스물여섯에 홀어머니가 되어 삼십 년이란 긴 세월을 수절해 오던 순이 삼촌
page 30
한평생 다 산 나이 쉰여섯에 끔찍하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평생 일궈 먹던 밭을 찾아가 양지바른 데를 골라 드러누워 버린 삼촌, 유서도 한 장 없이 죽었으니 그것은 표면상 아무 뚜렷한 이유가 없는 죽음이었다. 그렇다. 정신이 잘못되어 죽었다는 큰아버지의 판단이 옳은 것이다. 평소에 지병인 신경쇠약이 뒤었으리라. 그런데 신경쇠약은 왜 갑자기 악화되었을까? 거기에는 어떤 계기가 있을 것이다. 무엇이 삼촌을 죽음의 궁지로까지 몰아붙였나?
page 60
"순이 아지망은 죽어도 발쎄 죽을 사람이여. 밭을 애워싸고 베락같이 총질을 해댓는디그 아지망만 살 한점 안 상하고 살아 났으니 참 신통한 일이랐쥬."
"아매도 사격직전에 기절허연 쓰러진 모양입니다. 깨난 보니 자기 위해 죽은 사람이 여럿이 포개져 덮연 있었댄 허는걸 보민......그때 발쎄 그 아지망은 정신이 어긋나 버린거라 마씸."하고 작은 당숙 어른이 말을 받았다.
"해필 그 밭이 순이아지망네 밭이었으니."
"그 밭에서 죽은 사람들이 몽창몽창 쏙어 거름되연 이듬해엔 감저(고구마) 농사가 참 잘 되어서. 감저가 목침덩어리만큼 큼직큼직 해시니까."
"그핸 숭년이라, 보릿겨범벅 먹던 때랐지만 그 아지망네 밭에서 난 감저는 사름 죽은 밭엣 거라고 사름들이 먹질 안 했주.
page 104
내 아래 또래의 아이들에게 몰래 양과자를 주어 아버지나 형이 숨은 곳을 가르쳐 달라고 꾀어내던 서청출신의 순경들, 철 모르는 아이들은 대밭에서, 마루 밑에서, 외양간 밑이나 조짚가리 밑을 판 굴에서 여러본 제 아버지와 형을 가리켜 냈다. 도피자 아들을 찾아내라고 여든살 노인을 닥달하던 어떤 서정 순경은 대답 안 한다고 어린 손자를 총으로 위협에서 무릎꿇고 앉은 제 할아버지의 따귀를 때리도록 강요했다.
page 144
그 옴팡 밭에 붙박인 인고의 삼십 년, 삼십 년이라면 그럭저럭 잊고 지낼 만한 세월이건만 순이삼촌은 그렇지를 못했다. 휜뼈와 총알이 출토되는 그 옴팡 밭에 발이 묶여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당신의 딸네 모르게 서울 우리 집에 올라온 것도 당신을 붙잡고 놓지 않느 그 옴팡 밭을 팽개쳐 보려는 마지막 안간힘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오누이가 묻혀 있는 그 옴팡 밭은 당신의 숙명이었다. 깊은 소 물귀신에게 차여가듯 당신은 머리끄덩이를 잡혀 다시 그 밭으로 끌리어 갔다. 그렇다. 그 죽음은 한 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30년 전에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이미 그때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삽십 년 전 그 옴팡 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삽십 년의 우여곡절 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었다.
예전에도 여러 번 읽었던 <순이삼촌> 이건만
이제야 순이삼촌을 만난 느낌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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