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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화 Jul 16. 2022

탈북청년 선발과정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저는 북한에서 왔다는 것이 부끄러워 거짓말을 했습니다. 북한에서 왔다는 것을 속였습니다. 이런 거짓말을 여러 차례 하다 보니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그때 방황하던 저를  잡아준 곡이 <Let It Be>였습니다.”

  “저는 17살 때까지 북한에서 살면서 팝송을 몰랐습니다. 또한 한국으로 올 때를 제외하고는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고 유럽을 가본 적도 없습니다.” 

   “한국에서 자원봉사로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저에게 비틀스의 <In My Life>를 들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영어를 잘 모르는 시기였기 때문에 영어사전을 옆에 두고 단어를 찾아가며 가사를 번역했는데 그 가사가 너무 좋아서 이번 비틀스 체험에 지원하게 됐습니다.”

  “북한은 여행의 자유가 없는 나라입니다. 저는 북한에서 고향 외에는 벗어나 본 적이 없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에 간다는 것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습니다.”

 

  5월 어느 날, KBS 본관 3층 회의실 오후 늦은 시간, 학생들이 하나둘씩 들어왔다. 

  <탈북청년 비틀스를 만나다> 영국 취재에 동행할 탈북청년을 선발하는 자리였다. 비틀스 음악을 듣고 위로를 받았다는 청년과 동행하려 했으나 그는 직업을 갖고 있는 처지라 열흘간 회사를 비우기가 어렵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결국 우리는 공개모집을 통해 동행할 청년을 선발하기고 했다. 


   “지원서를 다 잘 쓰셨습니다. 글 쓰는 법을 누구한테 도움을 받았나요? 북한과 남한은 어휘도 다르고 쓰는 맞춤법도 다를 텐데.......” 

  당시 면접위원이었던 심사위원들(부서장과 팀장)이 이구동성으로 지원서를 훌륭하게 썼다는 칭찬을 했다. 일단 지원자들이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 지원서를 썼으니 면접에 참여한 학생 중 누가 선정되더라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지원자들이 지원서를 잘 쓰게 된 배경에는 사전에 작가의 많은 조언이 더해진 덕분이기도 했다.     

  

  일단 각자 자기소개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졌다.

  간호사가 꿈이었던 L 씨는 북한에서 농사꾼의 자식은 농사만 지어야 한다는 지침 때문에 꿈을 포기해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루 종일 밭에 나가 김매는 일이 해야 했다. 일이 힘들어 농장에 안 나가면 데리어 오고, 식량도 끊어지니 나가야만 했다. 하는 수없이 밭에 나가 밭고랑에 앉아 울기도 많이 했다. 그때 그는 가끔 CDR(CD에 기록하는 장치로 북한에서는 남한드라마를 중국에서 인터넷으로 다운로드하여 이런 CDR이나 UBS 담겨 유통되고 있다.)를 통해 남한 드라마를 보면서 ‘아! 저기는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여기서 이렇게 농사만 지으며 청춘을 보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에 20살에 북한을 나오게 되었다. 마침 그 당시 북한은 화폐개혁으로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온갖 소문이 횡횡하던 시기라 지금이 자신한테는 오히려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에 북한을 나왔다. 그는 부모님을 북한에 두고 홀로 남한에 정착한 경우였다. 


  J 씨 역시 북한에 가장 힘들었던 점은 경제적인 문제보다는 꿈을 실현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웠고 마침 아버지가 먼저 남한에 정착하고 있어서 아버지가 아들을 데려온 경우였다. 그는 북한에서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와서 또래들 보나 두 살 정도 많은 나이에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처음에 북한에서 왔다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에 북한에서 왔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친구들이 ‘스타크래프트’ 게임 이야기를 하는데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 부지불식간에 북한말이 튀어나와도 북한에서 오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고 이후 그 거짓말들이 계속 불어났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게 되었고 친구들이 하나둘씩 떠나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비틀스의 <Let it Be>를 들어보라고 권했다. 그 당시 그는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영어를 잘 몰랐기 때문에 한국 노래만 듣던 시기였는데 친구가 권한 그 노래가 내용은 모르는데 그의 마음을 울렸다. 그는 인터넷에서 가사를 찾아보았는데 가사 내용이 그때 자기의 상황과 맞아떨어졌다. ‘힘든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어머니가 꿈속에서 지금 힘든데 엇나가지 말고 그냥 놔두면 자연적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그 가사가 그때 그를 잡아주었다. 그 후 그는 자신감을 갖고 친구들 앞에서 북한에서 왔노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떠났던 친구들과도 가까워질 수 있었다. <Let it be>가 만들어진 배경을 보면 폴 메카트니가 매니저인 브라이언 앱스타인이 사망한 후 애플 회사를 차렸는데 경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밤 꿈속에서 어머니가 나타나서 Let It Be’라고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이에 영감을 얻어 쓴 곡이라고 한다.      

  

  자연의 이치, 순리에 맡긴다는 것. 

  지난 연말에 별세한 1970년대 3대 저항가수 중 한 명으로 꼽히는 1세대 포크 가수 양병집(본명 양준집)씨 노래 가운데 <역>이라는 곡이 있다. 밥 딜런의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를 개사한 곡이다. 여기서 역은 기차 역할 때 역(驛)이 아니라 거스를 역(逆)이다.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노래를 김광석 씨가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로 제목을 바꿔 불러서 히트한 곡이다. 처음 양병집 선생한테 역(驛) 노래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을 때 ‘거스른다는 역(逆)을 노래 제목으로 지어서 히트 안 된 것이 아니었을까요?’라고 농담처럼 묻고 싶은 적이 있었다. 

  나의 KBS 직장생활도 그랬다. 맞벌이 주말부부로 지방에서 근무하면서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서울로 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쉽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지쳐 포기하고 사표를 쓰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정년까지 근무할 수 있었던 것은 때론 순응할 줄도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을 쳐도 안 되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기회가 자연스럽게 주어지기도 했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서 모리 교수는 루게릭병으로 몇 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형선고를 받고 몸부림치지 않았다. 아니 어찌 사형선고를 받고 두렵지 않았을까만 그는 하루 중 잠시 몸부림을 친 후 현실로 돌아와 일상을 즐기려 했다. “죽음은 생명이 끝나는 것이지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네.”, “모든 것은 태어나고 죽는 거야.”라고 말하며 죽음을 받아들였다. 죽음이 발끝부터 시작하여 폐까지 조여 오는 순간까지도. 그 결과 제자인 미치가 모리 교수님과의 마지막 수업이자 마지막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면접에 참여한 학생들이 북한을 나오게 된 이야기와 대한민국 정착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 그리고 극복 이야기를 들으며 딱 한 명만 뽑아야 한다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 작가 역시 면접에서 일부 학생은 떨어트리기에 너무 아깝다면서 더 동행할 수는 없는 건지 좀 사정을 해달라는 눈치를 주는 것 같아 나도 용기를 내봤다. 하나재단 관계자한테 면접 과정을 설명하고 혹시 한두 명 더 동행할 수 있는 예산은 없는지 요청했고, 흔쾌히 허락해줌으로써 결국 3명의 청년과 함께 비틀스 영국 취재를 다녀올 수 있었다.


 이번 취재에 대한 학생들의 기대감을 들으면서 어깨가 무거워짐과 동시에 3명의 탈북청년들의 활약도 기대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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