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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화 Jul 17. 2022

홀로 두만강을 건넌 아이들

  나는 탈북청년들과 비틀스 취재를 하면서 그들이 북한에서 지냈던 이야기와 탈북할 당시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J씨가 북한에서 딱 한번 기차를 타봤다면서 학교 다닐 때 원산으로 수학여행 다녀왔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회령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한번은 고등학생으로는 최고의 여행지였던 강원도 원산 송도원 국제청소년 야영지에 다녀왔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송도원 국제청소년 야영소는 1960년대 강원도 원산에 설립된 북한의 대표적인 국제야영시설로 알려져 있다. 북한에서는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여행지인데 J군네 학교가 당첨되었다고 했다. 큰 트럭 회사 사장이 친구 아빠여서 학생들이 그 트럭 뒤에 타고 출발을 했는데 도중에 차에 기름이 떨어지는 바람에 다음날 아침 새벽 거의 다 되어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근처에는 김정일 별장이 있고 야영소 시설이 얼마나 좋았던지 처음 보는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가 있었다고 했다. 친구들이 신기해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내려왔다를 에스컬레이터가 멈추는 밤 열시까지 그곳에 머무는 동안 매일 반복했다고 했다.

  

  H씨이야말로 기차를 보면 탈북할 당시가 떠오른다고 했다. 그는 무산을 경유해서 국경으로 가는 화물열차를 몰래 타고 국경까지 왔다. 무산은 광산지역으로 석탄을 실어 나르는 화물열차가 많았다. 화물열차는 전기가 약해서 천천히 가기 때문에 올라타기가 쉬웠다. 반면 천천히 가는 바람에 6시간 기차를 타야 국경근처까지 올 수 있었다. 나중에 보니 온 몸이 석탄가루로 시커멓게 되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국경근처에서 강을 건너 북한을 나올 수 있었다. 물론 강을 건널 수 있게 도와주는 중계인, 조력자들이 있다고 했다. H씨의 말이다.

  “두만강 제일 상류로 올라가면 물이 안 깊어요. 거기서 그분들이 알려준 대로 혼자 강을 건넜죠. ‘너 저기만 넘으면 뭐가 나온다.’ 라고 알려주었죠. 거기에는 경비들도 몇 명 없고 그때 당시 11월이라 날씨가 엄청 추웠어요. 강을 건너는데 살얼음이 막 얼어 있었어요.”

 그가 북한에서 중국으로 오기까지 강을 건너는 시간은 20분정도, 무섭지 않았을까?

 “엄청 무서웠죠. 그때 정확히 저녁 7시 45분인가에 딱 건넜거든요. 근데 11월 저녁 7시쯤이면 어둡잖아요. 근데 중국 쪽은 좀 밝아요. 조그만 야산 하나를 딱 넘으니까 알려준 그쪽에서 택시 한대가 불을 깜빡깜빡거리면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그때부터 그 차를 타고 중국에 있는 엄마와 연결된 친척 분을 만날 수 있었죠.”

   H씨는 무산에서 석탄을 실은 화물차에 6시간을 몰래 숨어 두만강 근처까지 왔고 두만강을 혼자 건너 중국으로 올 수 있었다. 

 

   J씨 역시 중개인의 도움으로 강을 건너 중국으로 올 수 있었다. 그가 강을 건넌 시기는 3월 중순경이었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는데 회령리에서 조금 내려갔어요. 3월 중순쯤이었어요. 얼음이 얼었죠. 살얼음이 아니라 아예 얼었어요. 근데 3월이다 보니까 끄트머리는 좀 녹고 중간에는 아직 쉽게 녹지는 않아요.”

  

  강을 건너면서 얼음이 깨지지는 않을까 하는 그런 두려움은 없었을까?

 “그런 정신이 없었어요. 제가 두만강을 넘은 건가 동네 개울을 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침 7시에 거의 날이 밝고 있는데 거의 다 건너갔을 때 거의 끄트머리에 가서 살얼음이 깨지면서 푹 빠진 거에요. 물이 엄청 차갑고, 다행히 발만 빠져서 허겁지겁 나왔어요. 그때 옆에서는 개가 왈왈 짓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아요.”

  그 역시 혼자 강을 건너 중국으로 올 수 있었다.  

  

  북한에서 홀로 강을 건너 대한민국에 정착한 청년들, H씨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했다.

  “이제부터 저도 시작이죠. 대학교도 그렇고 지금까지 한국에 와서 저 같은 경우는 대학을 들어가려고 피나는 노력을 했죠. 솔직히 저는 광주 시내를 벗어나본 적이 없어요. 2년 정도 아침저녁으로 학원을 왔다 갔다 하는 게 전부였어요. 재수학원이요. 그게 저의 일상이었죠.”

  H씨는 한국에 오자마자 바로 입시학원에 등록해 수능을 준비했다. 지방에 있는 큰 재수학원에 등록했는데 원장이 북한에서 온 학생이 수능 준비하는 것은 처음 본다서 위로도 해주고 학원비도 받지 않고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고 한다. 그는 2년 동안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했다고 했다. 학원만 다닌 것은 아니고 어린이집에 가서 청소도 하는 등 자원봉사도 일 년 반 정도 꾸준하게 했다. 대학입시에 이런 봉사활동도 많이 반영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특별전형이긴 했지만 수능최저등급을 충족시켜 S대에 합격할 수 있었다. 합격통지를 받았을 때의 느낌은 어땠을까?

  “면접 볼 때 느낌이 정말 좋았어요. ‘아 정말 되겠다’ 했는데 합격 발표를 듣는 순간 세상을 다 가진듯한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ARS서비스가 있거든요. 합격자 통보 서비스요. 그걸 녹음해서 질리도록 들었어요. 몇 십 번을 들었어요.”

녹음파일재생안녕하십니까 ~~ 번의 이름은 000이며 정시모집에서 최종합격입니다.

  그에게 한국에서의 첫 성과라고 할 수 있는 대학 합격통보를 받은 2월 2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라고 했다.

 

  10대에 두만강을 홀로 건너 대한민국 땅에 정착한 탈북 청년들, 

  이제 이들은 리버풀에서 런던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제2의 인생을 꿈꾸고 있다. 

  리버풀에서 무명시절을 보냈던 비틀스는

  런던으로 향하면서 어떤 꿈을 꾸었을까?

  그들은 과연 자신들이 세기적인 밴드가 되리라 상상이나 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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