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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울림 Aug 02. 2020

#.4

주간 <임울림>

4라는 단어는 한국에서 '죽을 사'와 겹친다고 하여 불길한 상징으로 남아 있다.


나는 반항이라도 하고 싶어서였을까. 왠지 소외받는 숫자란 쓸쓸하고 오해받는 숫자란 운동장 한가운데 홀로 앉은 외톨이 같아서 더 좋아해 보려고 했다.


네 번째 이야기는 내가 애착을 갖는 감정인 '우울'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2015년 1월 1일, 당시 나는 홀로 재밌는 실험을 했다. 새해에 대한 나만의 테마를 잡고 살아보자는, 일종의 의식을 거행한 것이다. 코드명은 우울. 새해 첫날, 아침부터 영화 님포매니악 볼륨 1, 2를 몰아봤다. 왜 하필 영화였느냐고? 당시 영화라는 장르에 미쳐 있었으니까. 그 행위가 지루한 일상 속에서 존재의 동질감을 줬다. 그것도 잠시겠지만 말이다.


종종 우울감에 빠져서 외로움을 많이 느꼈는데, 고질적이라는 생각에 차라리 피하지 말고 허우적대보자는 마음도 있었다.

내 삶의 방식은 그랬다. 중학교 시절, 내가 아니꼽다며 협박한 애들에게 직접 찾아갔고(승산이 없는 상황이었다), 혓바늘 때문에 짜증 났을 땐 차라리 더 아프라고 혀를 씹었다. 그게 내가 처한 상황이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빨리 해결하고 자유롭고 싶었다.


나는 항상 나를 디폴트 -1의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 생각하고 산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느끼던 나는 굉장히 센티멘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름을 좋아하기도 한다. 비를 잔뜩 머금어서 언젠가 울어버릴 것 같은 기분. 구름은 나를 사로잡고 있는 고질적 우울감과 닮아 있기 때문.


아무튼 내가 4를 편애하는 것처럼, 우울을 편애하는 2015년에 나는 굉장히 많은 것들을 버리고 새로운 모습을 찾았다. 단단해졌다고 해야 할까. 비가 온 뒤 땅이 딱딱하게 굳는 것처럼?


이따금 우리는 우리의 삶이 이정표를 찾지 못할 때 남들의 이목을 따라 선택한다. 마치 어떤 과자를 먹고 싶어 마트에 들렸는데 원하는 과자가 없다고 다른 걸 집어 오는 것처럼. 그러면 왠지 과자를 먹어도 찝찝함이 남는다.


우울이 어느 순간 나를 급습할 때, 우울이 안겨온다고 표현하고자 한다. 결국 우울도 나의 일부니 그것으로부터 도망가기보다는 살펴 안아주는 게 추후를 위해서라도 좋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다. 좋은 것만을 취한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얼마나 다층적으로 나를 이해하느냐의 여부가 나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나'라는 식탁에는 즐거움과 우울이 동시에 놓여 있다. 편식은 좋은 게 아니니 내가 주도적으로 똑똑- 노크하며 우울에게 찾아가 보는 거다.


보편적으로 우리가 회피적 태도로 우울을 대하듯 사회가 우릴 대할 때, 비로소 나는 우울을 이해할 수 있다.


바쁜 하루하루 속에서 나는, 청승맞은 우울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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