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울림 Aug 19. 2020

#.5

주간 <임울림>

된통 당한 날.


머릿속엔 그 생각밖에 없었다. 꽤나 분하고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요즘 내 주위에 벌어지는 일들을 두고 나는 대책 없는 푸념을 쏟아내기 일쑤.

내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삐딱하게, 뭔가 부수고 싶었다.


나, 나의, 내 등등 1인칭 소유를 주장하는 말들은 어쩐지 덤벙하고 바보 같다. 어쩐지 120kg까지 살이 찐 육체의 느낌이 그렇다고 할까. 이건 상상이니 접어두도록 하자.


오늘은 조직치유 프로젝트에 들어가 상담을 받았다. 된통 당했다는 건 상담에서 벌어진 일이다. 조직치유라는 명목 아래 선생님 앞에서 모든 불만을, 마치 현명한 비판인 듯, 선의의 재판관인 듯 읊어댔다.

그것이 마치 매달 마감마다 오는 번아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선생님은 본격적으로 내 기를 꺾어놓겠다며 강한 어휘로 나를 눌러냈다.

이제 겨우 2년 차에 접어든 내가, 경영상황부터 사내 소통 문제까지 운운하는 것은 그 보직을 담당하는 이들을 무시하는 거라고 선생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나의 내면은 마치 혈기왕성하게 미쳐 날뛰는 개처럼 요동쳤다. 식은땀이 났다. 맞는 말이었다. 지적과 충고는 그들의 무력함을 내가 증명하겠다는 꼴이었으니.

나는 나 자신도 보지 못한 채로 외부에 시선을 돌렸다. 내면이 풍족하지 않으면 외부로 시선을 돌린다.

나의 우울, 나의 신경증은 짜증의 형태로 끓어내며 '나'라는 그릇을 녹여내고 있었다. 마그마 같은 짜증, 그릇을 녹여서 바닥을 흥건하게 태웠다. 나는 곪아가고 있던 것이다.


회사는 조직이고 조직에서의 톱니바퀴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을 하면 된다. 최소 우리 회사는 그것이 보장돼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나의 욕망이었다.  묵묵히 인정을 바라지 않고 꿋꿋이 하는 것. 그게 필요하다고 하셨다.


영원히 긍정하라는 이 사회에서 부정은 멸시되고 있었으나, 부정은 내면의 혼돈을 다스리는 데 영 유용하게 쓰였다. 흙이 젖어 땅이 굳듯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마음을 다졌다.


비판이 썩 나쁘지 않다. 무한한 찬양론자보다는 현실적 비판론자가 되는 길이 내게도 어울린다. 스스로를 성장시키기 위해 굳건히 닫힌 벽을 허문 한여름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