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 fardeau qu'on aime n'est point pesant 스스로 선택한 짐은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고 손꼽히는 프랑스어.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직업을 갖겠다고 시작한 공부는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부푼 꿈을 안고 들어간 대학원 생활은 기대만큼이나 즐거웠지만, 생각보다 더 힘에 부쳤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는 법이라 했던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었지만 늘 좋을 수만은 없었고 무엇보다 현실은 현실이었다. 대학원에 들어갈 때만 해도 어차피 학비는 학자금 대출을 이용할 생각이었고, 이자만 우선 변제하다 추후에 통역사가 되어 갚아버리면(?)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통번역대학원 준비 학원 선생님도 그렇게 하셨다고 하니, 뭐 하면 되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학기 중에 대출 이자도 나간다는 사실은 잠시 잊고 있었다. 그리고 학교를 다니면서 필요한 생활비는 회사생활을 하면서 귀엽도록 조금 모아둔 돈과 함께 틈틈이 과외나 아르바이트로 통/번역을 하면서 벌 요량이었다. 당시의 계산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고 실제로도 그렇게 시행을 했다. 다만 '우아하게'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남는 시간에 '우아하게' 나의 꿈을 위해 필요한 일을 하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이건 뭐 우아하긴 한데, '우아한' 백조가 물속에서 쉼 없이 발을 움직이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달까.
막상 대학원에 들어가서 공부를 시작하고 보니, 내가 생각했던 현실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번역이면 번역, 통역이면 통역, 입시 준비와는 비교도 안되게 늘 새롭게 공부해야 할 것들이 생겨났다. 배경지식 쌓으랴 어휘며 표현 공부하랴 스킬 익히랴 하루하루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부산하게 보내는 와중에 공부만 하고 과제만 해도 하루가 금세 가버렸다. 번역 과제를 하느라 밤을 지새우기도 부지기수였고, 꿈에서도 번역 수정을 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24시간 내내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니 시간을 어찌어찌 내려면 낼 수는 있지만 통번역대학원 커리큘럼이라는 것이 '끝이 없는 공부'의 연속이라고나 할까. 더 많은 양의 정보를 접하고, 더 풍부한 어휘를 쌓고, 절대적으로 많은 인풋을 넣고 그만큼 아웃풋을 뽑아내는 연습이 많으면 많을수록 실력 향상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더불어 단지, 주구장창 읽고 듣고 말하고 연습만 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었다. 어떤 부분이 잘 되었고, 어떤 부분을 향상해 나가야 하는지 전문가의 조언과 동기들의 크리틱이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런 면에서 한번 빠지는 게 엄청난 공백이 될 만큼 대학원 수업시간이 중요한 과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교수님들도 학기 중에 수업을 빠져가면서 까지 하는 아르바이트는 권하지 않으셨다.
우선, 수업의 흐름을 놓치게 되면 1차로 수업을 듣지 못하니 우선 당사자에게 손해가 된다. 수업에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이야기를 하고, 또 교수님은 어떤 피드백을 주시는지 그 모든 순간이 공부인데 그 수업을 놓치면 같은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그리고 2차로는 같이 수업을 듣는 동기들에게도 피해를 주게 되니 이 역시 손해다. 통역도 그렇고 번역도 그렇고 내가 필요한 피드백을 받지 못하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받기만 하고 피드백을 주지 못하면 그 역시도 수업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한 것이 되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큰 손해이자 리스크는 다시금 당사자에게 돌아온다. 극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바로 프로 통번역사들과 견줄만한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따라서 자칫 설익은 실력으로 통역이나 번역을 하게 될 경우 혹시라도 미흡한 점이 있을 시 그 평판이 나중에 프로 통역사로 필드에 나가게 되었을 때 쉬이 사라지지 않게 되니 자신도 모르게 자기를 위험에 빠뜨리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분야가 다 그렇긴 하지만, 프랑스어는 특히 업계가 좁기 때문에 정말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알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실력도 실력이고 그 실력에 대한 '평판'도 중요하다. 사실 이 마지막 부분 때문에 교수님들이 무분별한(?) 통/번역 아르바이트를 말리신 것 같기도 하다. '평판'이라는 것이 쌓기는 어려운데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기 때문에.
솔직히 처음에는 통번역사가 되려면 최대한 경험을 많이 하는 게 좋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오히려 아르바이트를 권장하지 않으시는 교수님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공부를 하면 할수록 교수님들이 왜 그렇게 아르바이트보다 더 공부에 집중하라고 하셨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명확해졌다. 우선 프로들이 즐비한 세계에서 용감하게 명함을 들이밀 정도의 수준이 되지 않고, 무엇보다 대학원에서처럼 공부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 시기가 지나면 필드에서 오로지 실력으로만 승부해야 하고, 이렇게 까지 뭉쳐진 시간을 들여서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는 점을 늘 강조하셨다. 늘 크리틱이 동반되는 수업에 때마다 시마다 괴로워하는 우리들을 보면서도, 교수님들은 실제 현장에서는 아무도 크리틱이나 평가를 해주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그저 다음에 부르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현실을 일깨워 주셨다. 졸업 9년 차가 되는 지금, 다시 돌이켜 봐도 그 당시만큼 열심히 많이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은 정말 두 번 다시없었다.
그런데 나는 모두의 바람처럼 그저 '공부만' 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부모님이랑 같이 살았으니 월세 걱정이나 밥 걱정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대출금 이자로 나가는 돈도 있었고, 거기에 교통비며 점심 값, 복사비, 스터디룸 사용비 등 용돈은 스스로 충당해야 했다. 그렇게 학과 공부를 따라가기에도 벅찬 와중에 마음은 늘 분주했고 시간은 늘 부족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정신이 없어도 너무 없었는지 어느 날은 손목시계를 두 개나 차고 나온 날 헛웃음이 났던 기억이 난다. 스스로 공부하겠다고 선택한 일이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겠노라 야심 차게 선포했기 때문에 학비며 생활비며 오롯이 내가 감당하는 게 마땅했다. 그래서 입학 전부터 이리저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며 일거리를 찾았더랬다. 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는 그런 아르바이트나 과외를 위주로.
그래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경험은 없다고 하던가. 대학원을 가기 위해 나오기는 했지만, 이전 회사에 선배들, 상사들과는 간간히 안부도 전하고 연락을 이어오고 있던 차에 감사하게도 번역이나 감수 의뢰가 들어와서 주말이나 밤 시간을 이용하며 수업을 따라갈 수 있는 한에서 조금씩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그 뒤로도 주욱 조금씩 생각이 나면 연락을 주셔서 틈틈이 번역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2학년 초기 즈음이었던 듯한데 당시 새로 부임한 사장님 프랑스어 과외를 맡게 되면서 그렇게 일주일에 1-2번씩 수업을 했다. 사장님 일정에 때라 부침이 있긴 했지만 졸업 후에 인하우스 통역사로 취업을 하게 되면서 그만두기 까지는 꾸준히 수업을 했었다.
정말 운이 좋게도 이전 회사 말고도 입시를 준비하면서 일했던 프랑스 문화원에서 계셨던 분을 통해서도 과외가 연결되어 전단지 한번 안 붙이고 대학원을 다니면서 꾸준히 과외를 할 수 있었다. 한 학생은 단기로 하긴 했는데, 영국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한국에 잠시 들어온 초등학생이 영국에서 프랑스어를 따라갈 수 있도록 방학마다 한 달 정도씩 과외를 갔었다. 남자아이라 그랬는지 수업에 집중하는 시간이 짧아 없는 유머 있는 유머 다 동원해서 주의를 끌어가며 그것도 영어로 가르치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에게도 도움이 많이 된 시간이었다.
방학 때는 작정하고 학원 강의도 해봤다. 2달 동안 학교 수업이 없으니 비교적 자유롭게 일을 할 수 있었고, 공부를 하면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종로와 강남을 넘나들면서 수업을 했었다. 기초 반이긴 했지만, 나를 '선생님'이라 불러주는 학생들 앞에서 수업을 하는 게 재미도 있었고 보람도 있었다. 나는 언어를 위한 언어를 배웠다면, 파티시에가 되기 위해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사람, 일상의 활력을 찾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 영어통역사이면서도 또 다른 언어를 더 배우고 싶어 공부하러 왔던 사람 등등 그전에 프랑스어과에서 만나지 못한 개강 이후로는 도저히 병행할 수가 없어 그만두기는 했지만 다양한 프랑스어 애호가(?)등을 만날 수 있어 의미 있는 자리였다.
그리고 한 번씩 선배들을 통해서 들어오는 통역 아르바이트 자리 나, '대학원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래도 비교적 저렴한 단가로 통역사를 고용하려고 했던 몇몇 업체에서 제안한 통역일로 이따금 씩 일을 하면서 다양한 인간군상들도 만났다.
한 번은 아프리카 말리에서 온 VIP의 건강검진을 돕는 의료 통역을 한 적이 있다. 유난히 빈부격차가 심하다는 그곳에서 오신 어느 높으신 분의 부인되시는 분이 모든 사람을 다 자기 아랫사람 대하듯 하대하며 태연히 행하던 갑질을 당하기도, 목격도 했더랬다.
그런가 하면 콩고에 어느 도시에서 서울에 어느 지방자치단체와 자매결연을 위해 방문한 시장님 일정을 동행하면서 회의며 일정 내내 통역을 해야 했던 적이 있었는데, 한국 측 담당자 하나가 정말 가관이었다. 그 나라에서는 차기 대선 후보로까지 거론되는 거물급 인사라는 사실에 의전에 공을 들이면서도, 함께 온 시장 수행단 중 한 명에게 '너네는 게을러서, 그래서 안된다'는 말을 면전에서 아무렇지 않게 쏟아내던 그 공무원의 어처구니없는 언사에 통역이 아닌 연기를 하며 상황을 무마했던 기억도 난다. 그래 놓고 '이건 통역하지 말아 달라' 면서 같은 한국인인 게 부끄러울 만큼 뻔뻔한 태도에 혀를 내둘렀었다. 반면 그 시장님은 본인도 일을 하면서 공부를 했노라며 나를 격려해주시기도 하고, 여러모로 배려를 많이 해주셨다. 보통 식사자리에서 통역을 하면 의례 거의 식사를 못하게 되는데 기업인들과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본인 대화까지 늦춰가면서 내가 밥을 먹어야 발언을 하겠다고까지 배려를 해주셔서 눈칫밥 아닌 눈칫밥을 먹으면서도 기분 좋게 통역을 했던 기억이 난다.
졸업시험을 가까워질 때 즈음 의뢰받은 회의 통역에서 상대편 통역사로 내가 너무나 존경해 마지않던 교수님과 함께 만나게 되어, 속으로 엄청나게 떨면서 통역을 하면서도 내심 뿌듯했던 기억도 있다.
'공부만' 할 수 없어 시작한 일들인데, 통역사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그리고 통역사와 의뢰자를 이어주는 에이전시를 상대하는 법 등등 '공부만' 했더라면 몰랐을 것들을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배움의 장이 되었다.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도 늘 부족하게만 느껴지는 시간 탓에 내심 '공부만' 하면 되는 동기들이 부러운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저 학교 생활을 위한 비용 벌이를 위해 시간을 할애하던 나와는 다르게 동기들 중에는 실제로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어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의 무게를 견디면서 공부했던 동기 오빠도 있었고, 육아를 하면서 꿈을 위해 없는 시간을 쪼개고 갈아서 공부하러 왔던 언니도 있었다. 아이가 잠들기까지 케어하고 잠이 들고 난 뒤부터 과제며 공부며 시작해야 했으니, 혼자인 나도 부족했던 시간, 그 와중에도 내게는 충분했던 '나만의 시간'이 얼마나 간절했을지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이제야 다시금 실감한다.
사실, 그때는 내가 힘든 것만 보이고, 나만 엄청나게 치열하게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치열했던 동기가 있었기에 나도 더 치열하게 매달릴 수 있었던 것 같다. 같은 시간을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보냈던 그 시간 동안 우리 모두가 정말 치열했던 것 같다. 날마다 실력을 늘리기 위해 공부했고, 밤을 새웠고 또 모여서 미래를 꿈꿨다. 좌절했고, 막막했지만 다시 꿈을 꿨다. 프랑스어라는 공통분모만 가진채 저마다 다른 사정을 가지고 만났지만 서로 같은 꿈을 꾸고 있었기에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며 응원했다.
통역사가 되고 싶어 들어간 대학원에서,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소중하고 귀한 시간에 나는 직업 말고도 참 얻은 게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