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서서히 끓어가는 물속에서 따뜻한 물에 익숙해져 결국 펄펄 끓을 때까지 뛰쳐나오지 못하고 머무는 그런 개구리가 나는 되고 싶지 않았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한 해 한 해 시간이 지나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것도 많았지만, 어쩐지 자꾸만 내가 있는 물이 조금씩 더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대략 입사한 지 3년이 지나던 시점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흔히들 회사생활에서 1년, 3년, 5년에 한 번씩 위기가 찾아온다고 하더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나 보다.
통역사면서 회사원으로 일하면서 이상과 현실의 차이로 느꼈던 좌절감과 더불어, 나는 언제부터인가 따뜻한 물이 뜨거워지기 전에 이곳을 떠나리라 다짐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래도 조직에서 일하는 경험을 더 쌓고 싶으니 이직을 시도해 보고, 정 안되면 회사에서 직무를 바꾸어 보고 그것도 안되면 프리랜서로 일을 하면 된다며 마음에 나름대로 마지노선을 정하고 느리지만 꾸준하게 이직 준비를 시작했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해외 프로젝트의 특성상, 그리고 엔지니어링 업의 특성상 대부분의 문서는 한국어를 거치지 않고 프랑스어와 영어로 번역되었다. 프랑스어로 받는 문서는 영어로 번역해서 배포했고, 영어로 초안이 쓰인 기술문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구글로 돌려서 볼게요”
처음 입사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이 적게는 50페이지 많게는 100페이지에 달하는 계약서나 기술문서들을 구글 번역기로 돌려 본다고 할 때 솔직히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오역이 수두룩한 데 대관절 그 나라 언어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렇게 돌려서(?) 볼 생각을 하는지 의아했다.
그렇게나 높았던 나의 콧대는 시간이 흘러 알파고가 이세돌을 꺾을 무렵부터 조금씩 꺾이기 시작했다. 딥러닝의 힘이 바둑에만 적용된 것은 아니었으리라. 한국어보다 유사성이 서로 높은 언어라서 그랬을까. 프랑스어와 영어의 번역 수준은 몇 년 새에 내가 느끼기에도 확연히 높아졌다. 실제로 대략적인 내용을 파악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고, 번역사의 역할은 내용을 대조하면서 실제로 잘못된 부분이 있는지 없는지 감수자의 역할을 하거나 문장을 보다 매끄럽게 만드는 편집자의 역할에 치중해도 될 정도였다. 물론 계약 관련 클레임과 같이 조항별로 단어의 효력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문서의 경우는 처음부터 번역이 필요했지만, 전반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내용을 파악하는 정도의 수준은 번역기의 아웃풋이 점점 더 쓸만해졌다.
물론 개중에는 원문의 내용과 쓰인 맥락을 모르면 번역 자체가 되기 어려운 문서들도 있었고, 또 분쟁조정안, 주주총회 회의록, 이사회 회의록 같이 한-불로 번역이 필요한 문서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 경우에는 처음부터 번역을 시작해서 마무리했다. 하지만 이렇게 처음부터 번역이 필요한 문서의 비율은 갈수록 줄어들었고, 새로 입찰을 시작하는 입찰서의 경우도 번역기로 초벌을 한 문서를 대조해서 감수 및 번역해달라는 의뢰들이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근 3년간 진행해오던 프로젝트가 끝나가면서 업무로드가 줄어들던 참이었는데, 구글 번역기까지 끼어들어(?) 자꾸만 나는 나의 쓰임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 원래도 번역보다는 통역을 선호했지만, 영어처럼 회사에서 자주 쓰이는 언어도 아닌지라 통역도 해외출장을 가지 않는 한에는 크게 필요한 일이 없었다.
통/번역의 특성상 내가 나서서 일을 만들어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도 적게 하면서 월급을 받았으면서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마는 바쁘게 돌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홀로 섬처럼 남겨져 시간을 바라보고 있는 일만큼 고역이 없다. 앞뒤가 훤하게 뚫린 업무공간에서 모니터에 뭐가 떠있는지 오가는 눈빛들을 감당해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일이 너무 많은 것도 괴롭지만 너무 없는 것도 괴롭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모두가 바쁘게 일하고 회의하고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일상에서 나 홀로 멈춰 있는 기분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참 쓰다.
일을 열심히 할 때는 제대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환경에 좌절했는데,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으니 나의 ‘쓰임’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동시에 객관적으로 보면 대기업이라는 좋은 환경에서 나는 왜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 스스로를 채근하고 채찍 하는 일도 잦아졌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자존감도 함께 떨어져 갔다. *자기 조절 감과 자기 안정감과 함께 자존감을 이루는 3가지의 축에서 자기 효능감, 그러니까 자신이 얼마나 쓸모 있는 사람인지 느끼는 것이 오랜 시간 흔들려왔으니 어쩌면 자존감이 떨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존감 수업- 윤홍균 작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나의 목소리를 찾고 싶었다.
그렇게 1년 정도 지났을까, 내가 몸담고 있는 물의 온도가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여기서 조금 더 있다가는 그대로 익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무엇보다 회사에서 떨어져 가는 자존감을 붙잡으며 나를 갉아먹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커리어를 위해서라도, 나를 위해서라도 변화가 필요했다. 새로운 프로젝트 입찰이 순조롭게 진행되고는 있었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다시금 통/번역 업무를 지원하면서 비슷한 일을 겪게 될 것이고 나의 근본적인 ‘쓰임’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따스했던 물 밖을 나가기 두렵기도 했지만, 그래도 변화가 절실했던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시도를 다 해보기로 결심했다. 무엇보다, 그간 해왔던 일을 앞으로도 계속했을 때 미래의 나의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언어적인 능력을 발휘하면서도 무언가를 더해야만 경쟁력이 더 생길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커리어 전환이 필요했다.
프랑스어 외길인생, 이직할 수 있을까?
우선 외국계 구직사이트에 이력서를 업로드했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르게 마음을 먹었다. 모든 제안에 응해 보겠노라고. 그래도 나의 강점이자, 지금까지 해온 프랑스어를 아예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의 강점을 살리되 다른 경험을 추가할 수 있는 업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프랑스어’를 필터로 해서 찾는 직무에는 재무나 영업관리와 같은 포지션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아무리 프랑스어를 쓰는 회사라고 해도 특정한 전문 지식에 실무능력이 중시되는 포지션은 아무래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가서 배울 수 있는 건 배워서 해내겠다는 마음으로, 면접이든, 지원이든 모든 면에서는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력서를 올리고 나서 오는 연락은 뭐든지 받겠다는 마음으로 제안을 기다렸다.
동시에 프랑스어를 키워드로 해서 국내 구직사이트에도 계속해서 검색을 하고 커뮤니케이션, 의전과 같이 내가 해온 업무와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는 곳은 다 지원했다.
구인 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엔터테인먼트, 유통업, 영업, 기술 관련업 등 다양한 업종의 포지션에 **서치펌, **헤드헌터와 같은 곳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나도 쓸모가 있는 사람이었구나’
하나둘씩 들어오는 제안에 내가 처음으로 떠올린 단어가 바로 ‘쓸모’였다. 어찌 되었든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필요한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더 늦게 전에 사내에서도, 그간 생각만 해왔던 업무 전환 가능성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프로젝트 파견 전에 원래 팀도 인사팀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지레짐작했었다. 실제로 동료 통역사 중 하나가 지원부서로 업무를 전환했고 전보다 더 만족하면서 회사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비단 그 동료뿐 아니라, 회사 내에서도 인사팀에서 현업으로, 현업에서 지원팀으로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인력 변경이 있어왔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익숙한 환경에서 업무를 바꾸어 보는 것이 나에게는 급격한 변화를 막아주는 방패막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이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몇천 명이 넘는 큰 조직에서 실무에 직접적으로 필요한 엔지니어도 아닌 통역사의 커리어를 위해서 직접 직무를 찾아주고 커리어 전환을 도와줄 박애주의 가는 애석 하게도 없었다. 몇 번의 면담을 통해 받아들인 현실은 이직 결정에 쐐기를 박아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의 모든 시도를 한 뒤, 6개월이 지났을 무렵,
나는 2곳에서 합격통보를 받았고 그중에 한 곳으로 이직을 했다.
물론 결코 쉽지 않은 결정들의 연속이었지만, 일련의 과정을 지나오면서 배운 것들이 많다.
그대로 머물러있었으면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어디에서 필요한지,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고 내 몸값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직을 계기로 나는 스스로를 ‘시도하는 사람’으로 칭하고 새로운 일이 왔을 때 망설이기보다는 시도해 보고 힘들더라도 변화에 적응해 보는 것으로 마음을 다잡았으니 이보다 더 큰 성과는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결국, 프랑스어로 들어갔던 대기업을 프랑스어 때문에 나오게 되는 경험도 추가하게 되었다.
프랑스어를 했을 뿐인데, 나는 시도하는 사람, 그 시도 속에서 배우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6년 반동안 회사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받은 것들,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했던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