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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햔햔 May 23. 2019

지금 살아 계신가요?

나이 핑계로 인한 무호흡 증후군

살았니? 죽었니?




    길가던 두 사내에게 긴장감이 흐른다.

    무슨 이유에선지 한치의 물러남도 없이 씩씩대고 있다. 십장생이 잘 컸네, 개 세끼 밥 줬네, 주옥같은 소리네. 사전 탐색을 위한 험한 말이 오간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 한 사내가 뜬금없이 질문을 던진다. "너 몇 살이야?" 다른 사내는 묻는 말에 대답은 않고 되려 묻는다. "그러는 너는 몇 살인데?" 이때부터 촌극이 벌어진다. 00년 무슨 띠네, 어린 게 버릇이 없네, 나이 많은 게 자랑이네. 갑자기 나이가 싸움의 중간에 들어서 버렸다.

 

    "저기요~ 언제 싸워요?"


    싸움하는데 나이가 중요한가? 맷집과 강단. 이거면 되지 싶은데 참 말이 많다. 때리는 것도 부담되고 맞는 것도 두렵기 때문이다. 애초에 저런 상황이 됐다는 건 싸울 마음이 없는 거다. 아마 말싸움으로 서로 욕만 퍼붓다 시들해지면 마지막 쌍욕을 날리며 돌아서 각자 갈 길 가겠지.


    요즘 내가 그렇다. 응??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의욕적으로 뭔가 하려다 스스로 나이를 묻는 일이 잦아졌다.  "너 몇 살이야?" "그 나이에 뭘 하겠다고.." "나이 값을 해야지", "몇 살인데 그러고 있니?" 아무 상관없는 나이 핑계로 부담되고 두려운 싸움을 질질 끌고 있다. 내가 요즘.


| 나이가 기준이 아니잖은가.


    외모와 행동거지에 있어선 생각지도 않던 나이다. 그런데 돈, 지위, 명예, 특히 새로운 시도에 있어선 꼭 나이를 들이댄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조급해하면서 말이다. 지금까지 쌓아 온 나의 지혜와 소양(?)이 그런 것으로 드러나지 않을진대, 자꾸 나이에 맞추려 안달복달이다.


    살아온 기간이 그 사람의 수준을 정하는 것은 아닐 거다. 나이가 40이라고 해서 꼭 직장과 집이나 차를 가져야 하는 것도 아니고 50이라고 해서 어느 정도 지위에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의 평균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허송세월을 보냈다고 하면, 이거 너무 서글프지 않은가.


    99세에 시집을 낸 할머니 이야기를 들었다. 그 연세에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더 대단했던 건, 90세가 넘어 시작한 일이고 시집도 아들이 모아둔 자신의 장례비로 자비 출판했다는 거다. 누가 봐도 늦은 나이였지만 할머니는 연연하지 않았고 진심을 다한듯하다. 생의 마지막까지 온전히 마음을 다해 삶에 임한다는 것이 이런 게 아닐까.


    93세에 시를 적기 시작했을 때, 93년을 살아왔던 모든 것이 쏟아져 나와 차곡차곡 담기기 시작한 거다. 결코 그간의 기간이 무의미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나도 괴로운 일 많았지만 살아 있어 좋았다.


    뜻하지 않은 울림이었다. 덕분에 하찮게 대했던 지난 삶과 아직 남은 삶들에 대한 가벼운 마음을 진지함과 감사함으로 바꿔 버렸다. 살아 있어 좋았다. 살아 있어 좋은 날이 아직 많이 남아있을 내게 진정 소중한 한 마디다. 시바타 도요 할머니, 감사합니다.


| 지금 살아 계신가요?


어떤 사람들은 25세에 이미 죽어버리는데 장례는 75세에 치른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이 정곡을 찌른다.

    '아. 나도 자칫 나이 생각만 하다가 39. 아니 만 37에 갈 뻔했구나', '나이 값 하려다 진짜 즐기지도 못했겠구나', '지난날을 후회하고 늦었다고 불평하면서, 그렇게 나도 몰래 40이 되어보지도 못했겠구나' 싶다. 아니. 생각해보면 긴 무호흡에서 이제 깨어난 걸지도 모르겠다. 헉헉.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열심히 살아서 뭐라도 이뤄야지' 하는 마음가짐이 아니다. '아직 늦지 않았어!' 하는 의지의 발로도 아니다. 그저 나이 핑계로 이제는 늦었다며, 삶에 온전히 마음을 다하지 않으려 했던 태도에 대한 경각심이다. 나이와 사회의 그릇된 잣대를 기준으로 내 삶을 평가하려 했던 잘못된 생각과 조급함에 대한 반성이다.


    이 나이면 이 정도 재력, 이 나이면 이런 것은 그만, 이 나이면 이제 이런 것도 조금씩 해야....

    이런 건 없다. 그저 "괴로운 일 많지만 살아 있어 좋아" 면 되는 거다. 세상이 갖다 붙인 나이라는 기준은 살아 있어 좋은 날들의 카운터(Counter)로만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삶이 좀 스펙터클하고 고단하긴 하지만 분명 즐거웠고 앞으로도 그런 날들이 많을 거니까.


    오늘도 여지없이 나와 싸운다. 치열하게 기싸움을 하는데 슬며시 또 물어온다. "너 몇 살이야?"

     .... 퍽! 주저하다 그냥 때려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글 하나를 완성한다. 아. 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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