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리더십(1) - 비전
비전은 성공을 담보하지 않는다.
대표로 일을 할 때 힘든 점도 많았지만 굉장히 행복했다. 전체적인 과정을 되짚어보면 부분 부분 몹시 힘들었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넓게 보면 좋은 경험으로 기억된다.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고 가슴 뛰는 일, 나의 개인적인 비전을 실현하는 일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그 결말은 그렇게 바라던 모습의 마무리는 아니었다. 분명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했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서 가시적인 성과가 없다 보니 사업은 지속성을 잃었다. 결국 도전을 포기하고 다시 현실의 세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하게 깨달은 것이 있다. ‘비전은 조직의 성공을 담보하지 않는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추상적인 이론으로 아는 것과 현실에서 뼈저리게 느낀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지금보다 더 혈기왕성했던 시절, 꿈이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나는 현실이 꼭 나의 바람대로 펼쳐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여러 기업이나 조직들은 ‘비전’을 전면에 내세우거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걸까? 아니, 왜 난 여전히 ‘비전’을 찾는 걸까?
우리는 정말 비전 있는 회사를 원할까?
최근에 내가 가르쳤던 수강생들의 자기소개서를 검토해 준 일이 있었다. 약 10명 정도의 자기소개서를 검토하며 흥미로웠던 부분이 있었는데, 그들이 회사를 고르는데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요소로 하나같이 ‘비전’을 1순위에 두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수강생들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믿지만… 한편으로는 “제가 고려하는 최우선 조건은 ‘금전적 보상’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신입 사원의 이미지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을 우려해 ‘비전’을 고른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 본다. 우리는 회사에 왜 갈까? 아마도 가장 1순위는 경제 활동을 통한 생계의 유지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더럽고 아니꼬워도 회사를 선뜻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먹고는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회사의 존재 이유가 경제 활동과 이윤 창출을 통해 근로자들에게 부를 분배하는 기능에만 국한된다면, 회사가 ‘비전’을 갖는다는 게 진짜 필요한 일일까?
우리가 접하는 여러 회사들은 저마다 대외적으로 자신들만의 비전을 공표하고 선전한다. 홈페이지 회사 소개 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대부분의 회사가 그들의 ‘비전’을 가장 먼저 노출시킨다. 다들 그럴듯한 비전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으니 그저 따라 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것이 진짜 중요하고 필요하기 때문에 비전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솔직히 나는 그런 비전들을 볼 때마다 과연 저 회사는 저 비전을 진짜 추구하는 조직일까 묻게 된다. 여러분의 회사는 어떤가?
비전에 대해
이어서 본격적으로 비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 글에서 언급하는 비전에 대해 간략히 정의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비전이란, 조직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를 정의하는 ‘핵심 이념(core ideology)’과, 장기적으로 무엇이 되고자 하는지,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에 대한 ‘미래상(envisioned future)’이 결합된 것이다.”
- Building Your Company’s Vision (James C. Collins & Jerry I. Porras, 1996) 에서 인용
보통 비전과 함께 미션, 핵심 가치 등을 같이 정의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글의 목적이 엄밀하게 비전, 미션, 핵심 가치를 구분하고 정의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번 글에서는 인용한 개념을 따라 폭넓은 의미에서 ‘비전’을 정의하고 사용하려고 한다.
조직에 비전이 필요한 이유
앞서 비전이 성공을 담보하지는 않는다고 얘기하기는 했으나, 그것이 필요한 기능적인 이유는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인간은 ‘왜’를 이해할 때 능률이 올라가는 존재이다. 특히나 창의적 활동을 통해 결과를 도출해야 하는 경우 내적 동기부여가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내가 이것을 왜 하는지도 모른 채, 효과적이지도 의미 있지도 않은 일을 반복적으로 한다면 일의 능률은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비전은 우리가 왜 이 일을 하는가에 대한 설명의 바탕이 된다.
비전은 우리가 이 일을 왜 하는지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회사가 추구하는 방향에 대한 ‘합의의 바탕’을 제공한다. 조직에서 일어나는 여러 의사결정들을 보면, 결과가 불확실한 상황에 대한 결정을 할 때가 많다. 여러 선택지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기대 결과가 매출이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선뜻 어떤 선택이 절대적으로 무조건 더 나은 결과로 이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사 결정에 관련된 이해 관계자들은 자기 부서의 이익이나, 개인의 특정한 견해에 근거해 판단하고 주장하기가 십상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제품의 디자인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신경 쓰는 편이다. 특히나 직접 고객에게 노출되는 것을 만들 때는 디자인을 최대한 세련되게 하기를 원한다. 실제로 대표로 일을 할 때에도 이런 부분 때문에 함께 일하던 이들이 많은 고초를 겪었었다. 다만 이것은 사람마다 그 견해가 충분히 다를 수 있는 부분이다. 누군가는 의사 결정을 할 때 디자인보다 실용을 강조할 수도 있다. 사업의 크기가 크지 않아 많은 사람이 방문하지도 않는 자사 홈페이지에 크게 시간과 돈을 투입하지 않기를 원할 수도 있다.
스티브 잡스는 이렇게 이야기한 바가 있다.
디자인은 인간이 만든 창조물의 근본적인 ‘영혼’이며,
그 영혼이 제품이나 서비스의 여러 겉모습(외적 레이어)으로 점차 드러나는 것이다.
- 출처: allaboutstevejobs.com
이렇게 리더가 분명한 지향점을 천명하고 비전을 제시한다면, 어떤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지점에 더 무게를 두고 선택해야 하는지가 상대적으로 선명해진다.
이렇듯 의사 결정 상황에서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될 때 판단의 기준과 근거를 제공하는 중요한 요소가 ‘비전’이다. 우리 조직이, 우리 회사가 어떤 것을 추구하고 어떤 방향을 따라 어떤 상태에 도달하고자 하는가에 대한 합의가 있다면 그에 맞춘 의사 결정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나는 여러 조직에서 무수히 많은 의견 충돌과 갈등을 경험했는데, 갈등이 효과적으로 조정되지 않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거나 힘이 더 센 부서의 결정을 따른다거나 특정 소수의 사람의 주도에 일방적으로 의사 결정이 이루어진다거나 하는 경우를 많이 경험했다. 대체로 조직 내에 그럴듯한 구호는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그 회사의 비전으로 합의되지 않은 곳들이었으며,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성과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우리가 이 일을 왜 하는지에 대한 합의가 없으면 조직의 통합이 저해된다. 서로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니 의견의 합치가 되지 않는다. 어떤 결정이 이루어질 때 승자와 패자가 나뉘고 그 결과 조직과 조직 간의 갈등이 유발되며 앙금이 남는다. 리더는 이런 현실적인 측면을 들여다보고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비전이 필요하다.
그런데 왜 비전은 가치지향적인 걸까?
구성원을 ‘부자’로 만드는 것이 회사의 비전이라던 대표가 있었다. 나는 아주 솔직한 비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돈이 중요했고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회사들은 비전을 언급할 때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거나 ‘우리의 서비스로 사람들을 이롭게 한다.’거나 하는 가치 지향적인 비전을 내거는 경우들이 많다.
이 지점에서 저마다의 철학과 견해가 달라진다. 특히 사람의 내적 동기가 어떻게 유발되는가에 대한 관점에 따라 의견 대립이 생겨난다. 주로 금전적 보상을 통한 동기부여와 그 외의 요소를 통한 동기부여가 가능하다는 입장에서 의견 차이가 발생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추구하는 것은 죄악도 아니고 잘못도 아니다. 그런데 금전적 보상의 논리를 극단적으로 밀고 가면 ‘돈이면 다 된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그러나 ‘사람은 오직 돈만을 위해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관점에서 보면, ‘돈을 벌기 위해 회사를 다니는 것’은 너무 뻔한 이야기이며 우리는 그것을 넘어서는 ‘의미’와 ‘이유’를 필요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와 같은 입장을 지지한다.
예컨대 회사를 자동차라고 할 때 돈은 ‘연료’와 같은 존재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연료가 없다면 자동차는 움직일 수 없지만 자동차의 목적을 ‘연료’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돈’은 회사에 필수적이지만, 나는 회사가 ‘돈’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좁은 시야라고 생각한다. 그대로 사람에게도 이 비유를 적용해 볼 수 있다. 돈이 우리 삶에 필수적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돈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 지점에서 리더에게 철학적 사유와 인간 이해가 요구된다. 회사 경영하기도 팍팍한데 철학이니 인간이니 하는 것은 사치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만약 회사를 지속 가능하게 운영하고자 한다면, 끊임없는 고민과 성찰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과 동기부여에 대해 심오한 철학적 검토를 하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조직들이 가치 지향적 비전을 내걸고 있다는 것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동기부여가 ‘가치 지향적’이라는 것에 대한 폭넓은 합의가 있기 때문에 비전도 가치 지향적인 경향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앞서 말한 ‘구성원을 부자로 만든다’는 비전은 솔직하긴 했지만 나에게는 그다지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이 회사에 오래 머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비전에 가치를 담는 이유는 구성원이 보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인 요소가 담겨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전이 제 기능을 하려면
구성원 그 누구도 동의하지 않고, 리더 스스로도 믿지 않는 비전을 ‘비전’이라 부를 수 있을까?
허구한 날 업계 1등을 외치고, 매출액 얼마 달성 같은 구호를 내걸고 구성원을 속된 말로 조지던 어떤 대표가 있었다. 그 조직의 구성원들은 ‘1등’, ‘매출액 얼마얼마’에 얼마나 동기부여가 됐을까? 칭찬할만한 지점이 있다면 대표는 그 목표에 진심이긴 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의 진심은 구성원과 잘 통하지 않았다. 구성원들은 대표가 제시하는 매출액 목표가 조직의 현실과 맞지 않다고 판단했고, 지나치게 ‘돈돈돈’ 하는 것이 오히려 구성원들을 옥죄었다. 그 회사는 한해 매출이 극적으로 높아지는가 했지만 그다음 해에는 실적이 곤두박질쳤다. ‘돈’만을 중심에 건 조직 안에서 그나마 협력이 되던 조직 문화는 무너지고 경쟁과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핵심 인재는 계속해서 이탈했고 조직의 분위기는 악화되기만 했다.
이처럼 비전이 제 기능을 하려면 구성원들과 폭넓은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회사가 추구하려는 방향과 도달하려는 상태가 그래도 납득 가능하고 이해가 가능한 수준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리더 자신이 이에 근거해 메시지를 내고, 그에 맞는 의사 결정을 해야 한다. 만약 조직의 비전에서 벗어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왜 그래야 하는지 구성원들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전에서 벗어난 선택과 의사 결정이 계속되면 구성원들은 비전에 대해 의심하게 되고 결국은 아무도 믿지 않는 빈 껍데기 구호만 남게 된다.
아울러 비전의 구현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충분한 설명과 전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립한 비전에 맞게 조직의 체계와 구조, 시스템이 구축되느냐가 관건이다. 이런 뒷받침 없이 말만 번드르르하면 비전과 현실의 충돌로 조직원들은 더 혼란을 겪게 된다. 앞으로는 이와 관련해서 조직의 체계, 구조, 시스템을 어떻게 만들어가면 좋을 지에 대한 나의 견해를 글로 풀어내 보고자 한다.
나는 지나치게 거창한 비전을 추구하자고 억지를 부리고 싶지는 않다. 내가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만 생각했을 때, 최소한 이 일을 왜 우리가 하는가에 대한 합의의 바탕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너무 장황한 비전을 늘어놓는 조직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기도 한다. 겉만 번지르르한 전시용 비전을 내걸 바에는 차라리 담백하고 진솔한 비전이 낫지 않을까.
리더는 비전을 정비해야 한다. 자기 자신이 동의하는 비전이 가장 먼저이며, 더 나아가 구성원들이 합의할 수 있는 비전 이어야 한다. 비전의 출발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조직의 비전을 수립하는 것은 리더의 중요한 책임이며 몫이다. 간혹 조직의 비전을 리더 자신이 아닌 부하 직원에게 수립하게 시키는 리더들을 본 적이 있는데, 이것은 몹시 잘못된 선택이다. 자기가 동의하고 체화한 비전이어야 구성원들을 합의로 이끌 수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은 리더의 책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이들이 꽤나 많다는 점이다.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슴 뛰는 비전을 원한다.
나는 이상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이었고 지금이라고 별반 다르진 않다. 다만 현실과의 절충과 조율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경험을 통해 깨우치고 배웠을 뿐이다. 누군가는 조직과 일에 대한 나의 주장에 대해 ‘너무 허황되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솔직히 인정한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가 보기에 허황되게 보일 수 있는 생각들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 나는 ‘가슴 뛰는 비전’이 있는 조직에서 일하고 싶고, 비전에 대해 언급할 때 자주 나오는 ‘매혹적인 비전’이 있는 조직에서 일할 날을 꿈꾼다.
그러나 나는 비전에 대한 이야기는 저마다 다른 관점, 다른 철학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음을 인정한다. 비전의 존재가 조직의 성패에 절대적인 조건인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솔직히 무조건 그렇다고 답하기도 어렵다고 생각한다.
앞서 인용한 아티클을 보면
“우리는 이와 같은 기업(HP, 3M, Johnson & Johnson, P&G, Merck, Sony, Motorola, Nordstrom 등)을 연구하면서, 이들이 1925년 이래로 일반 주식시장 대비 12배 더 뛰어난 성과를 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Building Your Company’s Vision” (James C. Collins & Jerry I. Porras, 1996 인용
라는 대목이 나온다. 개인적인 공부를 하면서 가장 현실과 충돌했던 부분이다. 저명한 학자의 유명한 아티클에 나오는 통계이니 믿을만한 데이터이긴 하겠지만, 우리나라의 기업 풍토와 현장의 현실을 볼 때 우리 현실에 꼭 맞는 것인지 아직 확신하지 못하겠다.
그래서 현실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생각하고, 비교적 현실에 더 가까운 언어로 말하려 노력하고 있다. 맞다. 비전이 매출액 증대에 당장 영향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이 모여서 함께 공동의 목표를 이루는데 ‘비전’이 긍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탁월한 성과까진 모르겠지만, 지속 가능한 조직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 ‘비전’이다. 그러므로 우리 조직이 더 나은 조직이 되기를 꿈꾸는 리더라면, 적어도 구성원들이 함께 동의하고 납득할만한 ‘괜찮은 비전’이 있는 조직을 만들기 위한 고민과 노력을 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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