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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Nov 23. 2022

'평범한 일상의 풍경'에서 꺼낸

오사다 히로시, <심호흡의 필요>



책은 작고 얇았다. 책장 하단부 구석에 납작하게 눌려 있었다. 작정하고 찾기 전에는 눈에 띄기 어려운 책이었다. 게다가 831로 분류되는 서가로는 웬만해선 걸음할 일이 없다. (한국시집도 안 읽는 마당에 일본시집을...) 그러니까, 우연이었다. 애초 도서관까지 한달음에 달려오게 한 책은 기대와 달랐고, 그 책을 도로 꽂아두고 돌아서는 게 아무렇지 않았다면 그 언저리를 서성이지 않았을 테며, 고작 책 한권 빌리고자 자신을 재촉했나 마음을 돌아보지 않았다면 ‘심호흡’이라는 단어가 과연 눈에 들어왔을까. 나는 말 한마디에 낚여 책장 앞에 엉거주춤 주저앉았다.


<심호흡의 필요>. 오사다 히로시. 책도 작가도 낯설었다. 시집인가 했는데 산문집 같았고, 산문이라기엔 역시 시 같았다. 문장이 참 단정하구나, 생각하며 페이지를 넘기다가 어느 한 장면에서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았다면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렇게 만난 책이다.




<느낌의 공동체>에서 신형철은 산문에는 ‘시가 된 산문’과 ‘그냥 산문’이 있으며, ‘산문시를 꿈꾼 흔적’이 없는 산문은 시시하다고 했다. 그가 말한 ‘시가 된 산문’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했다. 그런 생각에 이르렀을 때 책의 번역자를 찾아 살폈다. 특히 아버지를 회상하는 8장은 모든 문장이 빠짐없이 좋았다. 번역서임에도 문장이 좋아 책을 통째로 필사하고 싶어지다니, (절대적으로 책이 얇아야 가능하겠지만 여하튼) 흔치 않은 일이다.


1부 <그때일지 몰라>는 하나의 질문과 여덟 개의 대답을 품고 있는데, 끝내고 나니 이건 아홉 개의 연으로 된 긴 산문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1부의 주인공은 ‘너’다. ‘너’는 아이였다가 어느 순간 어른이 되어 버린 어린 시절의 나다. 나는 그 시절의 나를 ‘너’로 호명할 수밖에 없다. 너와의 거리감은 필연적이다.


'멀리'라는 곳은, 갈 수는 있어도 가면 되돌아올 수는 없는 곳이다.
어른인 너는, 그걸 잘 알고 있다.
어른인 너는, 이제 아이인 너에게로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멀리까지 와 버렸기 때문이다.


1장에서 작가는 언제 어른이 되었을까 자신에게 질문한다. 그는 기억 속에서 오랜 장면들을 불러내 여덟 번 답한다. “그때 너는 이제, 한 명의 아이가 아니라, 한 명의 어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통렬한 깨달음의 문장이 장면마다 중첩되며, 사랑스러움, 그리움, 씁쓸함, 서글픔, 색이 다른 감정들이 거세게 파동치며 그 파고를 높인다. 절정에 도달할 때까지.


2부 <큰 나무>는 일상을 소재로 한 비교적 짧은 산문시들로 엮여 있다.


작가는 ‘매요신’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하루의 무료함, 뜨거운 커피를 내리고, 너는 매요신을 읽는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화려한 것은 마음에 걸리니까, 하지 않는다. 매요신은 말의 평담함을 올곧게 바랐던 북송의 시인이었다. 지렁이, 방아깨비 (...) 뭐든지 시로 지었다. 누구에게나 보이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평범한 일상의 풍경에서 시를, 모자에서 비둘기를 꺼내듯, 꺼냈다.
원래 사물 그 자체에는 추함도 아름다움도 없다. 중요한 건, 추함이나 아름다움의 포로가 되지 않는 것.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인간의 자의적인 감정으로, 이 세상의 장난에 대해 아름답다느니 추하다느니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조용히 혼자 중얼거렸던 천 년 전 거리의 시인이, 너는 좋다.



말의 평담함이란 뭘까. ‘고요하고 깨끗하며 산뜻한’ 것. ‘마음이 고요하고 욕심이 없는’ 것. 북송의 시인이 오래전 귀히 여겼다는 말의 평담함을 히로시는 자신의 시 속에서 실천하는 듯 보인다. 누군가를 얼마나 좋아해야 닮아갈 수 있을까. 흉내 내는 게 아니라 그 정수를 담아내는 일. 그저 좋아한다고 되겠는가. 거듭 읽는다고 되겠는가.


#하지만필사는하고싶다

#일단책을먼저사야지

#좋은것과좋아하는것을가까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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