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출근
07.02.12. Di.
눈이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날, 첫 출근을 했다.
면접 날 역에서 내려서 회사까지 걸어가면서 한참을 해멨기 때문에, 이번에는 미리 구글맵으로 길도 확인하고 역에서 버스를 탔다. 독일에 와서 U-Bahn과 S-Bahn은 지겹도록 탔지만, 버스는 잘 안타고 다녀서 였을까, 아니면 너무 긴장한 탓이었을까 버스가 회사를 지나치는 광경에 당황해서 다급히 벨을 누르고 내렸다. 그리고 시간을 보려는데 핸드폰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멀어져가는 버스에 있을 내 폰을 보며 회사가 아니라 버스를 쫒아가야하나 고민했다. 어차피 부츠까지 신었고, 눈 밭이라 달릴 수도 없는데 출근이라도 제 시간에 하자면서 아예 핸드폰을 쫓아가는 것은 포기했다.
내 자리를 안내받고, 인수인계를 해주는 독일인 슈테판이라는 친구에게 초면에 핸드폰을 버스에 두고 내렸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얘기부터 했다. 독일에와서 두 번째로 잃어버리는 스마트폰인데다가 아주 후지더라도 카톡이 된다는 것은 독일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나에게 유일하게 안도감을 주는 존재였다. 슈테판은 스마트폰이라면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거라고 했다. 누군가 주우면 그냥 가져가거나 장물로 팔거라면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분실물센터와 버스회사에 나 대신 전화를 걸어 확인해주었다. 물건을 잃어버렸는데 독일어를 할 수 없으니 전화해서 간단히 확인하는 것 조차 이렇게 부탁을 해야한다. 이 곳에 온 이후로는 이런 순간마다 문맹이나 이방인의 설움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 전에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기분이다.
핸드폰에 반쯤 나간 정신을 추스르고 면접 때 만났던 Berger씨에게 회사와 우리 팀, 내가 하게될 일에 대한 소개를 들었다. 우리 팀은 독일인 boss와 프랑스인 1명, 독일인 4명 그리고 한국인 나 이렇게 7명이었다. 2명의 독일 인턴 친구들을 학교로 돌아가게 되서 내가 그 일을 하고 조만간 새로운 인턴이 더 올 것이라고 했다. 다행히 나는 영어로만 일할 것이니 걱정말라는 얘기를 들었고, 불행히도 이 회사의 공용어는 불어와 영어이지만 이 곳은 독일이니 직원들은 의사소통은 독어로 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전 세계에 있는 회사에 빚독촉을(overdues management) 하는 업무를 맡았다. 독일어를 못하기 때문에 독일을 제외한 해외 거래처들의 연체대금을 관리하는 게 내 일이라고 한다. 일하면서 SAP를 써야하는 데 한국에서는 경영정보론 시간에 이론만 배웠고(오라클이라는 단어만 기억이 난다...), 독일학생들은 실습을 하면서 배운다는데 난 이 회사에와서 난생 처음 SAP를 실제로 봤다. 슈테판이 간단한 사용법을 알려주었는데 , 일단은 SAP 언어셋팅을 영어로 바꾸는 것부터 해야할 것 같다. 더욱 예상치 못했던 장애물은 엑셀이었다. daily cash management 를 도와야하는데 자동차 부품이름과 세금 등 온통 독일어로 된 내역이고, 엑셀 자체도 독어라서 시간이 갈 수록 울고 싶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했는데 단축키는 만국 공통어라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독일어 키보드는 y와 z 의 위치가 바뀌어 있어서 실행 취소할 때마다 깊은 빡침을 느꼈다.
슈테판에게 일을 어느정도 배우고나니 벌써 오후 4시였다. 나는 주 35시간 일하는 인턴, 더 정확히는Praktikantin(실습생)이다. 당연히 하루에 7시간을 꽉 채워 일하겠거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4시 20분 쯤에 슈테판이 " 오늘은 첫 날이라서 할 일도 많지 않은데다가, 곧 기차 시간이니까 조금 일찍 가는게 어때?" 라고 말했다. 나는 학교를 땡땡이 치자는 제안을 받은 학생처럼 망설여졌다. 아니, 그러면 안될 것 같았다. 아무리 할 게 없다지만 퇴근시간까지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 내가 경험한 한국회사의 모습이었고, 심지어 정각에 일어나면 뭐라고 한 마디쯤 들을 수 있는 게 회사였다. '슈테판이 친절해서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건가?' 라는 생각도 해봤다. 그래서 " 그럼 boss 한테 물어보고 올게, 오늘이 첫날이니까. 난 어떻게 해야할지 잘모르겠어서..."라고 하자. 슈테판은 약간은 당황해 하면서도 기다릴테니 물어보고 오라면서 가지말란 얘기는 절대 안할테니 걱정말라는 얘기도 덧 붙였다.
잔뜩 긴장한 채로 정신없이 바빠보이는 보스의 투명한 방 앞에서 그가 통화를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항상 미소짓는 (그래서 가끔은 그게 무서운) 보스가 인사를 건넸다.
" Songhee, Are you okay? Do you need something?"
" It's okay. Well...I think I've done my work cuz it's first day and nothing much to do."
" Uhm...Can I go home now?..."
나는 말 그대로 "집에 가도 될까요?" 하고 물었다. 그리고 보스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 Of course you can. And you can go home whenever you want because you can work 35hour per week flexibly"
" You don't need to ask me next time ;)"
아, 이곳은 이런 곳이구나. 나는 지금 약간 유치원생같은 질문을 한 상황이구나.
" 선생님, 저 이제 다했는데 집에가면 안되나요?"
첫날부터 충격에 빠질 일이 많았다. 폰은 못 찾을 것 같다.(하아...)
집에 돌아오니 기숙사 내 방의 형광등이 싸이키조명처럼 깜박거렸다. 기술시간에 형광등 갈기를 제대로 실습해보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감전이 될까 무서워 손도 못대고 있다.
그래서 불도 켜지 못하고 암흑속에서 컴퓨터로만 첫 출근의 소감을 남긴다.
2015.11.12 목
실제로 대기업에서 일하는 한 친구는 얼마전까지 거의 매일 밤 12시 이후에 퇴근했다. 자정이 가까워서 '먼저 들어가봐도 되겠습니까?' 라고 말했다가 안된다는 상사의 단호하면서도 비논리적인 대답을 들었단 얘길 들었다. 내가 요즘 지내고 있는 판교에도 많은 오피스들이 늘 늦은 시간까지 형광등이 켜있다.
계약서에 싸인한 만큼 일했는데 왜 집에가도 되느냐고 물어봐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