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마' 멀쩡한 남자들이 나서지 않는 이유
영화 <82년생 김지영>에는 김지영의 남편 대현(공유 분)이 근무하는 회사의 여자 화장실 불법 카메라 이슈가 등장한다. 내부 직원이 불법 촬영한 영상이 남자 직원들 사이에 공유되다가, 사내 연애 중이던 남자 직원이 자신의 여자 친구에게 해당 화장실을 사용하지 말라고 알려주는 것을 계기로 해당 사건이 밝혀진다.
그 남자 직원은, 적어도 적극적으로 그 영상들을 퍼뜨리거나 낄낄거리며 감상하지는 않았겠지만, 사건을 제대로 알려 종결시키기보다는 자신의 여자 친구만 그 범죄현장에서 빠져나가기를 원했다. 이는 사실상 불법 영상을 촬영한 범죄자뿐만 아니라 그것을 공유하는 범죄를 저지른 동료들을 감싸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앞의 문장을 통해 나는 성범죄 현장을 목격하고도 이를 방치하는 남자의 사례를 비판했다. 그러나, 과연 내가 동일한 상황에 처했다면 과연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을지 자신이 없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괜히 정의의 사도 행사를 했다가 주류 남성들의 세계에서 미운털이 박혀 배제될까 봐 두렵기 때문이고, 내가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가 아니기에 문제 해결이 절박하지 않기 때문이다.
페미 코인을 탄 키보드 워리어의 비겁한 변명
나는 여성들의 입장을 대변하는(제대로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글을 작성하고 있다. 지금이 여성 상위 시대라고 믿는 남자들이 보기에, 나는 여자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페미 코인을 탄, 남자의 자존심을 버린 저열한 스윗남일 것이다.
나는 이 방면에서 아직 키보드 워리어에 불과하다. 직장에서, 사석에서 남성인 친구나 동료들, 상사들을 만났을 때 굳이 젠더 이슈를 화제 삼지 않으며, 그들이 여성을 폄하하거나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드러내는 이야기를 해도 굳이 반박하지 않고 대충 넘어간다. 논쟁을 발생시켰을 때 그들과의 관계가 손상될까 봐, 괜히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버릴까 봐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내가 실명으로 글을 작성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다.(필명인 연하남은 내 이름이 아니며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말하기는 조금 부끄러운 뜻을 가지고 있다.) 이름을 밝히고 글을 작성하면, 언젠가 내 주변의 남자들이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여자들에게 아첨을 떨고 있었구나, 하며 나를 혐오하고 배척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출간이라는 보상이 아직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나의 사회적 관계 손상을 각오하며 실명을 밝히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남자들 중 나 같은 남자들이 어느 정도 있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내가 성평등을 주제로 글을 쓸 때마다 라이킷을 눌러주는 분들의 상당수가 남성인 것을 보면, 나처럼 정체를 숨기고 사는 스윗남이 사회 곳곳에 숨어있지 않을까 싶다.
스윗남 각 개인들이 갑자기 일시에 용기를 내서 여성과 연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가 아닌 소시민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매우 높은 수준의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성평등을 지향할 수 있는 사회 구조 만들기 : 학교와 군대의 차이
이처럼, 스윗남은 겉보기엔 제법 번지르르할지도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비겁하기에 사회 변화에 선제적 역할을 하지는 못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공교육 현장이 힌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직사회의 경우, 절대평가로는 여전히 성평등 지수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직종들을 기준으로 한 상대평가로는 괜찮은 성적표를 기대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여전히 학교에서도 종종 성인지 감수성 부족을 드러내는 사례 및 성폭력 사례가 보도되긴 하지만, 적어도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 발생할 확률은 상대적으로 낮다고 느끼며, 여성이라는 이유로 주요 업무 혹은 보직, 승진에서 배제되는 일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타 직종에 비해 과연 남자 교사들이 성인지 감수성이 유독 뛰어난 것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사석에서 여성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는 분들도 아직 꽤 있는 것을 보면 크게 다르진 않다고 느낄 때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직사회가 차이를 보일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여자가 많기 때문이다.
통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유초등의 경우 대략적으로 90% 이상의 교사가 여성이며 중고등학교도 어느 학교를 가든 절반 이상의 교사가 여성이라고 보면 된다. (다만 국공립에 한정하며 사립의 경우는 다를 수 있다.) 사실 교직사회가 여성의 비중이 높은 것은, 교사는 공무원과 더불어 여성이 성차별을 당하지 않고 공정하게 경쟁하여 확보할 수 있는, 육아휴직을 하고도 돌아오는 것을 보장받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직업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있지만, 어찌 됐건 학교에서 여성들은 높은 지분을 확보했다.
여성이 많다 보니 여성에 대한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드러낼 경우 이에 대한 반작용도 강력하게 발생할 수 있다. 게다가 교감, 교장, 장학사 등 승진한 인원의 상당수도 여성이기에 직무상 위력을 확보한 다수의 여성들을 무시하고 성차별적 언행을 감행하기는 매우 어려운 구조이다. 교직사회의 남성들은,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여성을 존중하고 대등한 동료로 인정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반면, 교직사회와 가장 반대의 성비를 보인다고 볼 수 있는 군대를 생각해보자. 군대는 극단적인 남초 사회이고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사는 거의 모두 남성이다. 학교와 달리 군부대는 폐쇄적이며 내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거의 알 수 없다. 내무반에서는 여성을 대상화한 성인 잡지가 돌아다니고 TV에 나오는 걸그룹의 몸매에 대한 저열한 수준의 평가가 아무런 견제 없이 이루어진다.
내가 근무했던 부대의 한 선임은 휴가 복귀 후 성매매 경험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했다. 다른 선임은 휴가를 나가기 전 여성을 구매할 지 아니면 꼬셔서 섭취할 지 고민이라며 들뜬 마음을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서 군대에서 끊임없이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필연적이며, 그러한 곳에서 2년 동안 살고 나오는 남자들의 여성에 대한 인식이 어떤 식으로 변질될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결국 이런 불합리한 성차별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제도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여성이 남성과 대등한 사회경제적 권력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여전히 갈 길은 멀지만, 과거와 달리 지금은 최소한 공적 영역에서 표면적으로나마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부당하다는 사회적 합의는 도출되어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차근차근 나아가야 한다.
단순히 직군 별로 여성 비중을 할당해서 뽑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사회적 장벽이 여성들의 사회경제적 성공을 가로막고 있는지 제대로 따져보고 그것을 해결해 나가자는 것이다. 입사 지원 서류를 검토할 때 성별을 알 수 없게 하고, 면접관의 성비를 맞춰보는 것은 어떨까. 결혼하거나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묻지도 않고 회사 핵심 업무에서 빼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믿고 맡겨보는 것은 어떨까. 육아휴직 후 돌아온 직원에게 의미 없는 잔소리 대신 제대로 된 복직 연수 프로그램을 제공하도록 법으로 강제하는 것을 어떨까.
너무 번거롭고 애매하고 허무맹랑해 보이는가? 당신이 누리고 있는 선거권과 각종 복지 혜택, 직업 선택의 자유, 법적 신분의 평등 모두 그런 과정을 거쳐 얻어낸 것이다. 사회적 진보의 수혜자로서 문 닫고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은 이기적이다. 여성을 비롯해, 아직 제대로 권리를 확보하지 못한 사회적 약자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