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박스 탈출, 같이 합시다
젠더, 갈등이 아닌 대화를 꿈꾸며
2022년 5월 11일 현재, 나는 <스윗남의 맨박스 탈출 표류기>라는 제목 아래 총 25편의 글을 작성했다. 한 권의 책에 담기에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분량이다. 나는 여성학 전공자가 아닌, 그냥 여성의 입장에 좀 관심이 많은 기득권 남성이다. 이 책에는 한국 사회의 젠더 갈등을 마주하면서 고민한 것들을 나름대로 꾹꾹 눌러 담으려 노력했고, 현재 시점에서 내 수준으로 다룰 수 있는 주제들을 거의 모두 담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나름대로 여성학에 관심을 가지고 도서관에서 관련된 여러 책을 읽었고, 그것들을 읽으면서 고민하고 메모했던 내용들은 내가 이 책에 쓴 내용의 소중한 기반이 되었다. 내가 쓴 내용들은 진지한 학술적 고민과 장기간의 치열한 사례 탐구를 거친 전문가들의 수준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그 책들은 나에게는 무척 의미 있고 내 인생의 가치관을 많이 성장시켜준 보물이다. 다만, 학술적 성격이 강한 책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읽히기에는 어려워 보였다. 내가 지적 수준이 뛰어나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나는 사회학과 역사를 전공하면서 딱딱하고 어려운 글을 자주 접했기에 그런 것들을 끈기 있게 읽고 이해하는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나는 새로운 연구 성과를 낼 수 있는 타입은 아니다. 내 지적 활동의 지향점은 어려운 내용을 최대한 쉬운 용어로 풀어내는 것이다. 이 책을 쓰면서 내가 생각한 목표는, 여성학에 대해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는 사람, 그리고 일반적인 중고등학생이 별다른 예습 없이 읽어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최대한 구체적 이슈를 통해 여성이 어떤 차별적 현실을 겪고 있는지, 남성들은 어떤 방식으로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지 드러내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이 여성의 입장을 완전히 이해하고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내가 반성하고 또 성찰해도 부족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제목의 끝에 표류기라는 단어를 덧붙였다.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이제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성찰은 독선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성의 입장을 대변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남성들을 욕하고 여성들의 품에서만 생존하고자 하는 뜻으로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남자들이 꼭 읽어주길 바라면서 썼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과 몇 년 전 밀양 연극촌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왜 여성 배우들이 뛰쳐나가지 않고 피해를 감수하며 버텨 왔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성폭력 피해 사실을 밝힌 사람들을 정치적 의도로 짓밟는 행위에 대해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가해자들의 주장만 믿으며 꽃뱀이라 믿었던 시절도 있다. 다른 남성들도 여성과 연대하며 서로 더욱 행복하게 어울려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동참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현재 한국 사회의 젠더 갈등은 대화의 여지가 없다는 점이 가장 뼈아프다. 갈등을 주도하는 남성들은 여성의 권리에 대한 주장 자체를 혐오하고, 이에 맞서는 것을 주도하는 여성들은 남성 전체를 적대시하며 고립을 자초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각 성 별로 강경파가 논리를 독점하며 과잉 대표되고, 이를 언론이 확대 재생산하면서 갈등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여성이라면 당부드리고 싶은 게 있다. 역사적으로 피지배층이 무언가 기득권층으로부터 획득한 개혁이나 혁명에는, 반드시 기존 기득권층 가운데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고 연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프랑스혁명에는 자유주의 귀족들이 협조했으며 흑인 노예 해방에는 함께 한 백인들이 있었다. 고려의 권문세족을 물리친 신진사대부 역시 일부는 권문세족 출신이었다.
여성 운동도 마찬가지다. 남자들 중에도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연대하고 있는 사람들, 혹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과 연대해야만 여성 운동도 보다 유의미한 성과를 획득할 수 있다. 남자 전체를 혐오하고 여성들끼리만 뭉치면 사회를 변혁시키는 속도와 수준에는 한계가 있다. 이야기를 나누고 여성들의 움직임을 지지해 줄 준비가 되어 있는 남자들을 찾고, 나올 수 있게 하고, 연대해야 한다.
나는 얕은 수준의 이 책이 여성과 남성이 갈등을 넘어 연대하는 미래를 실현하는 데 작은 디딤돌이 되길 바란다. 대화의 물꼬를 트는 데 작은 마중물 역할을 해줄 수 있다면 만족할 것 같다. 여성학에 좀 더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는 입문서가 되거나, 중고등학생들이 제대로 읽을 만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영광스러울 것이다. 세월이 흐른 뒤 이 책이 과거의 유물이 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