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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 Dec 07. 2020

백그라운드, 나를 둘러싼 등 뒤의 세계

그 시선들…


열아홉 번째 세계,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를 소개하는 방식에 고민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아. 자연스레 나를 둘러싸고 있는 등 뒤의 세계, 백그라운드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지.

일반적으로 백그라운드라는 말은 참 형식적이고 거품이 느껴지는 단어가 되어버린 것 같아. 풍경의 배경처럼 그저 나를 둘러싼 배경일뿐인데, 학교나 회사, 고향, 자격증 같은 단어들이 줄줄이 붙어 다니는 것이 나는 늘 거북하게 느껴지거든.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그런 이력서의 글자들에 집착하는지 이해가 안 돼. 그런 것에 집착해본 경험이 있고, 집착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다른 모습이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나를 둘러싼 아주 소소하고 중요한 백그라운드의 풍경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해.



2020년 12월

“나를 볼 수 없으니 내 주변을 보는거야.” _ BGM # Earned It | The Weeknd


나를 둘러싼 백그라운드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주위를 둘러본다. 360도를 빙 돌아보면 방을 이루는 네 면의 벽과 그 안을 채우고 있는 가구와 물건들이 보인다. 오랜 역사를 함께 해 온 것과 최근에 만나게 된 것들이 섞여 오묘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침실이지만 작업공간의 성격이 강한, 기능이 역전된 방이다. 방은 그 사람의 히스토리를 엿볼 수 있는 가장 내밀한 공간이다. 그래서 자세히 둘러보면 좋아하는 물건, 색과 같은 취향을 알게 되고, 책들의 제목만으로도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지극히 자신만의 사적인 공간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탐험해 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

문을 열고 나가면 이제 '나'의 공간에서 '우리'의 공간으로 전환이 된다. 집의 중심에 거실과 주방이 일자로 이어지며 집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벽이 이어지고, 그 사이사이에 똑같이 생긴 방문들이 늘어서 있다. 재미있는 공간을 찾아보기에는 집의 구조가 너무 단순해 가구와 물건들이 없다면 누구의 집인지 알 수 없다. 몇 년에 한 번씩 흥미로운 동네들을 찾아다니며 살아봤지만, 집에서 바라보는 풍경이나 동네 분위기를 제외하고 단순히 집 만을 생각해보면 모두 어디에선가 봐 온 집의 풍경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공간을 점유하고 산다는 것이 집을 다른 모습으로 보이게 한다.

또 거기에다가 공간 위에 시간이라는 변수가 작동하면 같은 공간이어도 계절에 따라 다른 풍경이 느껴질 때가 있다. 창가 주변에 나란히 줄지어 놓여있는 홍시가 연한 색에서 진한 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가을에서 겨울로 바뀌는 사이의 계절감이 집에 잠시 머물고 있다.


시선을 창 밖으로 옮겨보자. 집의 네 면을 따라 서로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남쪽엔 도시의 빌딩들이, 서쪽엔 인왕산과 북악산이 병풍처럼, 북쪽엔 옆 집 사이의 공간이, 동쪽엔 한옥 지붕의 기와들이 고스란히 창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온다. 이제까지 살아봤던 집들은 한층에 두 세대가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집을 둘러싼 모든 뷰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처음이다. 집 안에서 보이는 뷰의 경험 또한 집의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겨울로 접어들며 창 밖의 나무 가지들의 윤곽이 오롯이 드러나며 마치 컬러 화면에서 수묵담채화로 전환된 듯 심플한 감각이 집 안으로 들어온다. 겨울의 중심으로 가면서 점점 색이 다 빠져 흑백의 풍경이 될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연극무대에 나올법한 나무의 풍경이지 않을까?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동네를 걸어본다

사람들의 자취가 사라진 적막한 골목길을 걷다 보면 길의 형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6년째 한 동네에 살다 보니 구석구석 장소에 대한 기억들이 쌓여간다. 이곳을 스쳐 지나간 가게와 새로 여는 가게의 모습들을 목격하며 동네 주민으로 이 변화의 증인과도 같은 역할이 나쁘지만은 않다. 동네에 스며들어 있는 듯, 속해있는 느낌이다.

주택의 마당과 공원의 모든 꽃이 지고, 잎들이 떨어지고, 붉게 물든 단풍이 이미 쪼그라들고 말라버려 바람이 불면 곧 바스락거리며 떨어져 사라질 듯 마지막을 예감하고 있다. 나뭇가지에 아직 남아있는 열매들은 이미 사람의 손길에서 멀어져 새들에게 마지막 먹을거리로 존재한다. 먹지 않더라도 곧 땅으로 떨어져 열매의 씨앗이 다음 생을 준비할 것이다. 작은 골목길 가장자리에 놓인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화분들은 파, 배추, 방울토마토를 키워먹던 흔적들을 남긴 채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가을에서 겨울로 전환되는 시간이 동네의 장소에 스며들어 이맘때의 동네 풍경으로 기억에 남게 될 것이다.



‘나’의 백그라운드

주변을 둘러봤으니 '나'를 둘러볼 차례다. 눈을 감고 나에게 중요한 것들에 대해 하나씩 떠올려본다. 하나, 둘, 셋. 그리고 그것 중에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의도하지 않은 선택인 것을 구분해낸 다음 이루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떠올린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 자신을 소개하는 방식이 늘 직업 위주로 정의 내려지는 것이 어딘지 식상한 느낌이 들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일로 만난 사람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로 대하곤 한다.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고 싫어하는지, 무엇에 감동하는지와 같은 그 사람의 취향, 개성, 아우라가 너무 쉽게 잊히고 다뤄진다.

사람은 각자의 히스토리를 갖고 지금의 시점에 와 있고,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또렷해지며 개성 강한 사람이 된다. 모든 사람의 걸어온 길을 그래프로 그려본다면 모두 다른 선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내면을 이끌어온 히스토리 속 모든 경험들이 모여 ‘나’라는 사람을 이룬다.

영화, 책, 만남, 이별, 우연, 사람, 야구, 음식, 여행, 유학, 프랑스, 파리, 서울, 건축, 도시, 사진, 드로잉, 글, 음악, 전시, 산책.

각자의 히스토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 업데이트되며 비슷하게 나아가기도, 완전히 다르게 바뀔 수도 있다. 그래서 그 히스토리에 만약 나의 선택이 아닌 부분이 있는데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버리고, 대신 어쩌다 멀어졌던 선택들을 일상의 바운더리로 끌어와 새로운 백그라운드를 만들 수도 있다.

바로 지금, 우리에게 선택이 주어져있다.

선택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도 포함해서.



자기만의 백그라운드를 만들다

선택 후에는 자신만의 백그라운드를 어떻게 만들 것 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우선 백그라운드라는 단어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스펙에 대한 고정관념을 깰 필요가 있다(기존의 스펙 문화를 비판하는 데에 초점이 있지 않다). 스펙이 필요한 일을 하지 않아도 쌓으려 하고, 실력으로 연결되는 것도 아닌데 모두가 그것에 집중한다. 나이와 상관없이 우리는 남들이 하는 것은 모두 다 시도해보고 다 잘하려고 한다. 이미 그럴 나이가 아니게 됐다면 나중을 위한 스펙은 던져버려도 되지 않나? 정말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해 보는 것이 더 현명하다. 오히려 스펙이 필요 없는 나이가 됐다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맞다.

모든 것을 다 완벽히 잘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고,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그 몇 가지에 집중한다. 그것을 위해 가장 먼저 필요 없는 스펙과 이별하고, 계획된 일상을 비틀어 보는 거다. 물론 일상의 틀은 생각보다 견고하다. 맞춤복보다는 기성복에, 수제가구보다는 공장제작 가구에, 주택보다는 아파트에 익숙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언제부터 우리는 이렇게 모든 걸 타협하며 이미 만들어진 것에 익숙하게 우리의 몸과 마음을 거기에 딱 맞춰 살게 됐을까?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가구, 옷, 음식, 사는 곳, 책, 영화를 발견해나가며 거꾸로  자신에게 맞추게 하며 살아가고 싶다. 왠지 모르게 ‘기존의’, ‘기성의’, ‘정해진’과 같은 말로 굳어진 단단한 세계에 뒤통수를 날리는 쾌감이 있을 것 같다.




P.S.
오래전부터 이런 류의 가치관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변화의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몇몇 느리게 흘러간 순간들 뒤로 나의 세계가 바뀐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거든. 그 순간에는 인식하기 어려웠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아, 그때였구나’라고 되뇌게 돼. 아직 제대로 피어나지 않은 작고 소소한 생각들이 구석에 모여 있다가 변화의 트리거를 만나 조각들이 서로 연결되며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게 아닐까 싶어.
그렇게 시작된 새로운 일과 일상에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나의 백그라운드’ 안으로 밀어 넣고, 버리고 싶은 것들은 과감히 바운더리 밖으로 던져 버리는 거지.
모든 선택이 나의 백그라운드가 되는 그런 일상을 만들어가고 싶어.
너의 백그라운드는 지금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

그대로인지 달라졌는지.

내가 달라졌듯이 모든 ‘너’ 역시 달라졌겠지.

다음에 만나면 너의 백그라운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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