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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 Dec 18. 2020

직업[을 바라보는 시선]의 재구성

그 시선들…


스무 번째 세계,

어떤 시기를 관통해 나가며 우리 사이에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이 변해간다는 걸 깨달았어. 언제부턴가 대화 속에 ‘나이’, ‘두 번째 직업’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 주제에 대한 이야기는 생각보다 우리의 가슴을 조여들게 했지. 나이가 주는 압박감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미래의 크기를 줄어들게 하는 것 같아. 크기뿐 아니라 스펙트럼도 단조로워진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일 거야.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머릿속의 상상력이 쪼그라들고 볼 것 없는 건조한 풍경으로 채워져 버리니 그곳에서 헤어 나올 방법이 별로 없게 되지.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것보다 그 이전에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한번 선택한 직업에서 멈추게 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직업에 대해 생각하기 이전에 미래의 모습에 대한 이미지를 상상해 보는 거지.
20대에 가장 많이 생각했던 ‘직업’이라는 단어가 다시 우리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어 오다니…… 한 바퀴 돌고 제자리에 돌아온 건가?
직업은 삶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일하는 공간, 끝도 없이 이어지는 프로젝트들.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하는 시간과 공간보다도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곤 하니까. 직업을 선택하는 일은 그런 의미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인 것 같아.
하지만 과정은 그에 비하면 사소하고 갑작스럽거나 느닷없이 정해지고는 하지.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학이라는 관문을 통해 직업을 선택하게 되는 경우는 너무 흔한 이야기니까. 졸업과 동시에 취업하게 된 첫 번째 회사가 곧 자기의 직업으로 이어지는 일도 많이 볼 수 있지.
이렇게 문장으로 늘어놓고 보니 미래를 너무 쉽게 정해버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그 선택의 과정이 자발적이지 못할 때 고민은 계속 주위를 맴돌게 되겠지.
평균값에 이르고 그것을 유지하는 일상에 목표를 둔 채 보험 들듯이 직업을 선택하는 방식이 예전부터 참 마음에 들지 않았어.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독특한 것, 튀는 것, 마이너 한 것들은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그것들을 꾹꾹 눌러 압축 패드에 넣어 깊숙한 곳에 넣어둬야 했지. ‘이론과 실무의 괴리’라는 이유를 방패 삼아 몰개성 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평범하다는 평가를 받으면 마음 상한 듯 불편해하면서도 목표는 그것에 둔다는 것은 어딘지 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잖아.

머릿속에 떠도는 직업에 대한 생각들을 풀어낼 필요가 있는 것 같아. 그리고 상상해 보는 거지.
미래에 대한, 직업에 대한…
그러니까 선택하지 않았던 또 다른 직업에 대해.



2020년 12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알 수 있는 건 언제쯤일까? 내게 그런 기회가 제대로 주어졌었나? 그러기에 기회는 충분하지 않았고, 어떻게 기회를 만들어야 하는지 방법을 알지 못했다. 답에 이르는 사람들은 아주 우연한 경험으로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가까운 곳에 롤모델이 있거나 책과 같은 간접 경험을 통해 자신의 본성과 잘 맞을 것 같다는 직관이 직업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경험과 지혜가 쌓이고 자신을 알아가는 동안 비로소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을 찾는다. 사람의 환경이나 성격에 따라 각자에게 맞는 '적절한 때'가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확실한 건 그 누구도 자신의 선택에 백 프로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만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시작부터 불확실한 선택일 수도 있는 직업을 한번 정해지면 마치 운명인 것처럼 끝까지 하는 게 맞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수도 없이 해봤다. ‘평생 직업'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 직업을 선택하고 또 다른 직업을 시도하고자 하는 마음을 짓누르곤 한다. 하나의 직업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참 지루하게 느껴진다. 어차피 정해진 시간을 살다가는 것이라면 여러 직업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살다 가는 게 나은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맡은 일은 뭐든 열심히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가 일을 잘하는 것과 하고 싶은지를 혼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어떤 일을 꾸준히 하게 되면 기본 또는 잘하기 마련이다. 일을 잘 함으로 해서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좋아하는 것으로 바로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성취감과 좋아하는 것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고, 그것은 분명 다른 종류의 감정이다. 성취감은 결과로 인해 만들어지는 감정인데 시간이 지나면 점점 옅어지게 되고, 다음 결과가 성공적이지 못하면 필요 이상으로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아, 그때 그랬었지.’하며 성취의 순간을 회상할 뿐이다. 하지만 그 일을 정말 좋아하면 결과와 상관없이 과정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이것 또한 선택의 문제다. 만족한다면 고민은 다시 넣어두고 가던 길을 계속 가면 될 뿐이다.


언젠가 '직업체험관' 건축 설계 작업을 위해 사례 답사를 간 적이 있다. 아이가 있는 부모라면 익숙하겠지만 개인적으로 조금 낯선 미지의 공간이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다양한 직업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아이들은 런웨이 위를 걷고, 소방관이 되고, 디자이너, 과학자, 교사가 된다. 미래의 자신을 상상해 보고, 될 수 없더라도 한 번 시도해 보는 것에 만족을 할 수도 있다. 아이들은 진지하면서도 즐거워 보였다. 답사 내내 그 아이들의 미래가 부러웠다. 어른을 위한 직업 체험관은 왜 없는 것인지 진지하게 의문을 던져보았던 기억이 난다.

두 번째 직업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은퇴를 하고 난 후의 두 번째 직업은 하고 싶은 일을 한다기보다 적절한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선택도 직업에 대한 가치관이 다를 뿐 만족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애초에 두 번째 직업이 인생에 메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의외라고 생각된다. 어쩌면 첫 번째 직업은 두 번째 직업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과거보다는 현재의 모습을 더 크게 받아들이며 자기 합리화 과정을 거치는 우리는 지나간 영광보다는 현재의 즐거움과 미래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직업을 찾아볼 의지가 있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떤 조직에 소속되어 일하고 있는 경우라면 이미 일의 바운더리가 조직의 방향성에 따라 정해진 곳이다. 확장의 여지는 회사 밖에서 찾아야 한다. 마인드맵으로 직업의 확장성을 그려 나가다 보면 생각보다 범위가 넓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곳 어딘가에 빛나는 돌이 있을 지도.

아예 백지에서 출발해 볼 수도 있다. 첫 번째 직업과 전혀 상관없는 낯선 곳에서. 어렸을 때의 꿈을 기억해 볼 수도 있고,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직업이 있을 수도 있다. 물론 막연한 기분이 들 수도 있지만 진정한 제로는 아닐 것이다. 사회생활로 단단해진 우리는 이미 경험과 지혜가 쌓여 예상을 뛰어넘고 훨씬 더 잘해 낼 수도 있다. 젊은 나이에 가능한 몇몇 직업을 제외하면 습득과 숙련의 속도는 10대, 20대의 시기보다 더 빠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자신의 메인 스트림에서 벗어나 의도하지 않은 자리에서, 오히려 베스트를 이끌어낼지도 모른다. 소설 속 주인공의 삶에 빗대어 볼 수도 있고, 그림 속 인물의 모습에서 원하던 것을 찾을 수도 있다. 직업에 대한, 미래에 대한 모습을 상상해 볼 단초가 주위에 가득 펼쳐져 있다.

직업에 대한 관점을 달리해 볼 수도 있다. 하나가 아닌 동시에 여러 개의 직업으로 살아가는 방법도 가능한 일이다. 일주일에 월, 화, 수요일엔 디자이너로, 목, 금요일엔 작가로 살아간다거나 일 년에 열한 달은 원래 직업으로, 한 달은 탐험가로 산다던가 하는 식으로 삶을 창의적으로 만들어내며 살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나의 직업에 대한 로망이다. 오래전부터 머릿속에 남아 계속 되뇌며 곱씹어보게 되는 노래 가사가 있다.

“inventer d’autre vie”,
다른 삶(의 방식)을 창조해 내다, 만들어내다.


일과 직업을 내가 원하는 대로 디자인해 살아갈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발견했던 지점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며 쌓이는 경험과 통찰은 사람의 시야를 더 확장시켜 20대에는 이해가지 않던 다른 분야의 이야기도 이제는 이해가 간다. 그래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건축가라는 바운더리를 느슨하게 해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도 좋을 것 같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 때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에 가장 적당한 타이밍이다. 백 퍼센트 확신이 아닌 불안함은 선택에 있어 당연히 따라오는 감정일 뿐, 불안이라는 감정을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직업이라는 단단하고 무거운 단어를 재구성해 나만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려 한다.




“멀리, 자유롭게, 원하는 곳으로 번지점프를.” _ BGM # Moonchild | The Other Side




나는 깊고 넓고 자유롭게
유영하듯 일을 만들고 디자인하고
확장해 나가는 삶을 꿈꾸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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