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도시, 탐험 노트

첫 번째 감각 지도

by 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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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닫히고 열리는 시간.


문턱 위에 서서 눈 앞의 도시를 바라본다.

안으로 향하던 감각의 촉수를 밖으로 뻗는다.

방은 웅크렸던 몸을 펴 부피를 키우고,

그만큼 감각의 자리는 넓어진다.


좁은 틈을 빠져나온 공기가

광활한 대기 속으로 왈칵 쏟아지며 요동친다.

살갗을 스치는 그 서늘하고도 낯선 기류가

비로소 길 위로 나섰음을 알려준다.


그 위에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눈으로 높낮이를 가늠하며

흐릿한 경계를 따라 걷는다.


이 지도는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어디에서 멈출 수 있는지,

어디로 흘러갈 수 있는지를 조용히 열어둘 뿐이다.


시간은 숫자를 지우고 리듬으로 흐르고,

패턴은 질서를 벗어나 춤을 춘다.

지도는 당신을 집으로 안내하는 대신,

자꾸만 낯선 골목 끝으로 밀어 넣는다.


감각의 중력에서 해방된 발걸음만이

이 지도의 유일한 나침반이다.


이 방에서는

도시를 완성된 풍경으로 보지 않는다.

걷는 동안에만 도시는 형태를 갖는다.


수많은 발걸음이 새겨진,

살아 숨쉬는 지도 위를 걷는다.

뚜벅— 뚜벅—



걷는 도시를 기록하는 법


지도를 펼치기 전, 첫발을 떼기 바로 직전. 도시와 나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경계 앞에 서서 이 도시를 걷는 사람들을 상상한다. 그것은 마치 우주선의 해치가 열린 것처럼, 익숙한 중력이 사라진 공간에서 사람들이 둥둥 떠다니는 풍경 아닐까. 처음엔 의도대로 되지 않는 몸짓에 발버둥 치지만, 마침내 무중력의 리듬에 몸을 맡긴 채 허공에 몸을 던져 춤을 추기 시작하는 조금은 유쾌하고 기이한 모습들.


감각의 중력에서 해방된 발걸음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까? 이 방에서는 목적지를 먼저 정하지 않는다. 계획된 동선보다 걷는 동안 생기는 우연과 흔들림이 도시를 더 정확하게 드러낸다고 믿기 때문이다. 보이는 대로, 발이 닿는 대로, 잠시 멈추고 싶어지는 곳에서 멈추며 걷는다. 그 끝에 만나게 되는 도시는 완성된 풍경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걷는 속도, 시선의 높이, 멈추는 순간에 따라 그때그때 다른 얼굴을 드러낼 뿐이다. 그래서 도시는 이 방에서 ‘보는 대상’이 아니라 ‘걷는 동안 형성되는 과정’이다. 관념의 무게를 덜어내고, 그 안을 춤추는 무용수처럼, 유영하는 방랑자처럼, 그리고 즐기는 산책자처럼 나는 도시 앞에 선다.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장소들. 장소는 만나기 전까지 베일에 싸인 세계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조용히 뒤에 서 있는 존재. 문득 묻게 된다. 왜 거기 서 있을까.


우리는 보통 장소를 배경으로 인식한다. 이야기 뒤편에서 공기처럼 익숙한 얼굴로. 사람과 사건을 돋보이게 하는 무대처럼. 늘 그 자리에 있지만 좀처럼 주목받지 않는 존재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이 무중력의 공기 속에서라면 그 질서를 잠시 뒤집어 볼 수 있지 않을까.


무심히 지나쳤던 장소들을 이 도시의 무대 중앙으로 불러내 시선을 맞춘다. 숨겨져 보이지 않던 감각이 일상과 상상 사이에서 확장되는 순간, 장소는 자신이 가진 낯선 층위를 드러낼 조건을 갖춘다.


걷는 동안 끊임없이 질문들이 떠오른다. 도시는 어떤 얼굴과 어떤 형태를 갖는가. 빛과 그림자, 소리와 거리, 문과 계단 같은 경계들은 어떻게 감각을 움직이는가... 이 질문들은 답을 향하기보다 다음 장면을 열어둔다. 하나의 풍경 뒤에 또 다른 풍경이 이어지듯, 도시는 질문을 통해 계속 걸을 수 있는 장소가 된다.


필드 노트 10권으로부터 태어난 하나의 세계


나는 걷는 도시를 기록하기 위해 필드 노트를 펼친다. 텍스트와 드로잉을 오가며 보이는 것과 느껴지는 것을 동시에 기록하는 방식이다. 디자이너가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어떻게 말하느냐’를 묻듯, 나 역시 ‘방식’에 더 관심을 둔다. 결과보다 과정에, 정답보다 질문에 집중한다. 이 기록은 설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시 걷기 위한 지도에 가깝다.


이 방에 등장하는 도시는 실제의 장소이기도 하고, 상상의 필터를 통과한 풍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끔은 그 얇은 경계 위를 오가며 서로를 바꾼다. 도시를 산책하는 동안 걷는 행위 자체가 선택과 시선을 만들고, 그 위에 사실과 픽션, 기록과 해석이 겹겹이 새겨진다. 그렇게 도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걷는 지도’가 된다. 나는 이 방식을 ‘감각 지도’라 부른다. 눈으로만 읽는 대신, 빛과 소리, 높낮이와 시간을 따라 길을 그리는 지도.


이 방은 그 첫 장이다. 완성된 도시를 보여주기보다 도시를 읽는 하나의 태도를 제안한다. 이 지도를 들고 걷듯, 도시를 천천히 통과해보기를 바란다.


서늘하고도 낯선 이 기류를 가르며 나아갈 당신과 나의 첫걸음 뒤에, 바람이 휘이이— 문앞을 쓸고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