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감각 지도
도시는 과거를 말하지 않는다. 다만 손금처럼 그것을 품고 있다.
―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모든 장소는 만나기 전까지 베일에 싸인 세계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조용히 뒤에 서 있는 장소를 본다. 문득 묻게 된다. 왜 거기 서 있는가?
장소는 언제나 배경이었다. 소설 속 무대처럼, 다른 것들을 빛나게 하는 조연이었다. 우리는 그 앞을 지나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만 익숙했다. 장소 자체는 공기처럼 익숙해, 인식의 뒤켠으로 밀려났다. 그래서 장소는 한 번도 주인공이 된 적이 없다.
현실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현실과 상상을 오가는 이곳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이제 그 질서를 바꿔보려 한다.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 주객이 뒤집히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무심히 지나쳤던 도시의 장소들을 무대 중앙으로 불러내고,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장소의 낯선 결을 드러내고, 우리의 시선과 교차시키며 그 안의 세계를 상상하고 확장한다.
역할의 반전과 질서의 해체, 그리고 재구성이 이어진다.
그 끝에 다다를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
감각의 날을 세우고, 상상해 본다. 그 풍경들을.
장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
들리지 않는가, 그 수다스러운 속삭임이.
그 위를 표표히 떠다니는 이야기들이.
이제 질문을 던져본다.
장소를 통해 떠오르는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우리가 경험한 풍경 너머, 또 다른 무엇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
고정된 장소의 이미지를 확장한다면, 도시는 한층 흥미로워지지 않을까?
현실을 뛰어넘는 픽션의 필터를 씌운다면, 장소의 풍경과 해프닝은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내지 않을까?
질문은 언제나, 하나의 대답 뒤에 또 다른 질문을 낳는다.
하지만 그 답이 궁극의 목표가 아니라면, 우리는 그 끝에서 무한한 가능성의 풍경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면서, 하나의 시나리오가 만들어진다.
이야기는 어떤 장소에서 실제로 경험한 일을 재현하거나, 혹은 일어날지도 모를 해프닝을 상상으로 그려보는 것이다.
모든 장소는 위치이기 전에 이야기를 품은 책이다.
그 이야기는 서로 다른 빛과 결을 입히며, 매 순간 장소 위에서 태어난다.
사람들의 삶을 담은 시와 에세이, 소설이 지금 어딘가에서 태어나고 있듯이.
책장을 연다.
하얗게 비어 있는 여백이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문득 되돌아보았다. 나는 어떻게 이 빈 페이지 앞에 서 있는 걸까.
책장 위에 가지런히 놓인 필드 노트 10권을 바라보았다. 그때야 필드 노트가 이 이야기의 시작임을 깨달았다. 어떤 사물이나 풍경을 마주할 때면, 나는 먼저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궁금해한다. 디자이너가 종종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어떻게 말하느냐’를 묻듯, 나 역시 ‘방식’에 더 관심이 간다. 노트를 들여다보면, 지금 무엇에 집중하는지, 어떤 취향과 스타일로 기록하는지, 작업의 흐름까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어느 날 문득 과학자들의 필드 노트를 접했고, 그들의 기록 방식에 매료되었다.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담은 그 기록은, 무엇보다 매력적인 세계로 다가왔다. 현장에서 글과 드로잉으로 관찰하고 기록하는 동안, 직관과 통찰이 세계를 확장시키고, 수많은 질문을 거쳐 스스로 답을 찾아갔다. 그들에게 필드 노트는 가장 본질적인 연구 방식이자, 인식의 도구였다.
이 방식은 나의 장소 탐험 태도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처음에는 텍스트 위주의 노트에서 시작했지만, 점차 드로잉이 더해져 지금의 드로잉북 형태가 완성되었다. ‘기록’은 언제나 세계를 바라보는 나만의 방식이었다.
필드 노트 10권에는 계절과 공간, 감각과 질문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그것들은 어느 순간 하나의 세계가 되었다. 서로를 비추고 교차하며, 하나의 시선으로 응축된 작은 우주였다. 이렇게 ‘나만의 필드 노트’가 완성되었고, 이 이야기는 그 바탕 위에 세운 작은 실험이다.
기록할 자리는 마련되었다. 이제 장소를 어떻게 표현할지, 무엇을 담을지 고민할 차례다.
도시와 건축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담아냈다. 일상 속 장소에 스며든 흔적을 따라가며 그들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상상의 필터를 통과한 장면들을 옴니버스처럼 겹겹이 쌓아 올렸다.
세상을 바라보는 도구가 달라지면, 풍경은 어떻게 변할까.
도시의 레벨과 윤곽을 새롭게 그려본다면, 또 어떤 장면이 열릴까.
빛과 어둠, 소리 같은 비물질적 재료는 어떻게 감각될 수 있을까.
창, 문, 계단 같은 경계들은 공간 인식의 장치로 어떻게 작동할까.
어디에나 있지만 쉽게 정의되지 않는 것들, 정체를 감추고 있는 모호한 존재들을 찾아 나섰다.
소리, 냄새, 빛, 그림자, 어둠, 색, 시간, 계단, 문, 윤곽…
이 모든 것이 장소를 해석하는 실마리다.
나는 이 기록과 상상의 방식을 ‘감각 지도’라 부른다.
눈으로만 보는 대신, 소리·빛·냄새·시간 같은 감각의 결을 따라 길을 그리고, 그 길 위에서 풍경은 다시 태어난다.
이 여정에는 열네 개의 감각 지도가 있다.
그리고 지금, 이곳이 바로 그 첫 번째 지도다.
도시 산책자를 위한 탐험 노트...
이 모든 이야기는 같은 풍경을 다르게 보는 시도다. 하지만 동시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이야기의 세계이기도 하다. 도심산책자를 위한 필드 노트에서 시작되었고, 나는 이 낯선 도시 풍경을 함께 걸어갈 안내자다.
오늘은 어떤 세계를 만나게 될까?
장소를 묘사하다 보면
그곳에서 파생되는 이야기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 상상의 세계 속에서 관찰자로 머물다 보면,
어느새 그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간다.
세상에 숨어 있는 단서를 따라
일상과 상상,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 사이를 넘나들며
보이는 것 너머의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모든 장소는 만나기 전까지 암호 가득한 미지의 세계다.
그 장소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즐거운 산책이 되기를 바란다.
도시 산책자를 위한 안내자로서
이제 그 장소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탐험을 시작하려 한다.
이 첫 번째 감각 지도를 당신에게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