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감각 지도
도시는 사소한 변화에도 평소 감추던 얼굴을 슬며시 드러낸다.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을 의식하며 걷다 보면, 문득 깨달음이 스며든다.
세상은 빛에 의해 드러난다. 그리고 빛을 만나는 방식에 따라 도시는 언제든 새로운 얼굴을 내민다.
빛은 도시의 구석구석을 비추며 나의 탐험을 이끈다.
미술관, 시장, 신호등, 골목길, 자동차, 나무, 안테나……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달라지는 도시의 표정 속에서, 문득 특별한 순간을 만난다.
흩어져 있던 풍경의 조각들이 이어지고 겹쳐지며, 하나로 녹아드는 찰나.
건축의 단면, 부재의 틈, 어딘가에서 잘려 나와 떠돌던 형상들이 하나의 선, 하나의 윤곽을 이룬다.
눈앞의 조각들이 비로소 하나의 풍경으로 다가오며, 도시의 실루엣을 처음 보는 듯 낯선 감각이 스민다.
나는 도시의 윤곽이 드러나는 그 순간들을 따라간다.
'윤곽'을 뜻하는 단어 ‘프로필(profile)’이 있다. 단어의 주변을 오래 들여다보면, 서서히 그 정체가 드러난다.
일반적인 의미를 넘어, 어원과 전문 분야에서의 쓰임을 따라가다 보면 단어를 둘러싼 얼개와 결이 보인다.
‘옆얼굴’, ‘개요’, ‘소개’, ‘윤곽’을 뜻하는 이 단어는 ‘윤곽을 그리다’는 뜻의 라틴어 ’프로필라레(profilare)’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출발한 단어의 흐름은 사람의 옆모습을 그리는 미술 장르 ‘프로필’로, 또 타인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지표로 이어졌다.
범죄 심리를 분석하는 ‘프로파일러(profiler)’에서도 그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안갯속 사건의 윤곽이 다양한 분석과 추론을 거쳐 어느 순간 '슥' 눈앞에 정체가 드러나는 장면은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자주 마주친다.
이 단어를 따라가다 보면, 윤곽은 본질이나 진짜 모습을 드러내려는 시도라는 걸 알게 된다. 어떤 것은 드러내고, 어떤 것은 감추며, 숨겨진 것을 앞으로 가져오고, 불필요한 것은 뒤로 보낸다.
도시의 윤곽이 뚜렷이 드러나려면 분명 조건이 필요하다.
어떤 빛, 어떤 거리, 어떤 시점에서야 비로소 또 다른 풍경이 떠오른다. 우리는 그제야 윤곽 너머의 이면을 온전히 인식하게 된다.
“아, 거기에 있었구나.”
길을 걷다 문득 바닥을 내려다보며 그림자의 방향을 확인한다. 태양의 위치를 알기 위해서다. 고층 빌딩에 가려 태양이 직접 보이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태양과 그림자는 언제나 반대편에 있지만, 그 관계의 중심에는 늘 태양이 있다. 빛을 받지 못한 사물의 뒷면이 그림자를 만들고, 그것이 바닥에 드리운다.
보도 위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블록 무늬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다. 걷다 보면 어느새 태양은 멀어지고, 풍경 뒤편에서 빛난다.
역광. 태양에 등을 지고 선 풍경은 어둠 속에 잠기지만, 그 주변에는 눈부신 빛이 번진다. 가늘게 눈을 뜨고 도시를 바라보는 순간이다.
시간이 흐르며 도시 풍경은 빛의 양과 방향에 따라 여러 층의 음영으로 변한다. 그리고 어떤 순간, 도시의 윤곽이 선명해진다.
낯선 도시를 탐험할 때면, 해 지기 전 푸른 잔광이 남아 있는 시간을 찾아간다.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올라 그 순간을 바라본다.
윤곽이 드러나는 순간을.
해 질 무렵, 건물 사이 좁은 길에 서면 길의 비율이 단면처럼 드러난다. 비움과 채움의 윤곽이 맞물리는 풍경. 그곳에서 아늑함을 느낀다면, 아마도 윤곽이 만들어낸 조화와 비율 덕분일 것이다.
윤곽은 본질을 드러낸다.
해가 지기 전 옥상으로 향한다. 낮에는 시선조차 닿지 않던 난간 프레임의 실루엣이 저녁이 되면 옥상의 풍경을 완성하려는 듯 존재를 드러낸다.
멀리 높은 곳에는 어김없이 십자가 실루엣이 도시 위에서 시선을 잡는다. 하늘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산 위의 남산 타워. 탑과 오벨리스크의 수직선은 도시 실루엣에 리듬을 불어넣는다. 도전하듯 솟아오른 형태는 하나의 기준이 되고, 그 아래서 사람들은 소원을 빌고 기억을 기념한다.
그리고 그 밖의 것들.
건물 위의 TV 안테나, 물탱크, 굴뚝, 처마 끝의 풍경, 추녀의 선, 기와 이음새. 모두가 마치 말을 건네듯 시선을 끈다. “우리가 일상을 지탱한다는 걸 알고 있느냐”고.
집 앞 전봇대와 전선들은 무수한 실루엣 사이를 정신없이 엮는다. 도시 전체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밝힌다. 이 네트워크는 한 점에서 시작해 가장 먼 곳까지 뻗는다.
윤곽이 드러나는 순간, 풍경의 디테일은 사라지고, 해가 지면 모든 것이 어둠에 잠긴다. 빛나던 도시는 사라지고, 밤이 시작되기 직전의 찰나만이 남는다.
비움과 채움의 경계가 선명해지며 세상이 둘로 나뉘는 듯한 순간. 도시의 지형과 스카이라인이 또렷해진다.
평소 스쳐 지나치던 사소한 것들이 어느 순간 중심에 선다.
아주 우연히 그런 시간과 장소에 다다를 때 볼 수 있는 찰나의 풍경. 아니, 어쩌면 모든 풍경은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난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빛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도시를 미세하게 새로 그려낸다. 그렇게 빛의 세계는 끊임없이 도시 풍경을 리뉴얼한다.
그러니 애써 무언가를 찾으려 하지 말고, 눈앞의 풍경을 그저 감상하듯 바라보면 된다. 그러다 보면, 보이지 않던 것이 불쑥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을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