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번째 세계
아… 이런 햇빛, 이런 바람, 이런 하늘이라니!
오늘 아침 창문을 열고 하늘을 본 순간부터 가슴이 진정이 되질 않았어. 여행에 대한 두근거림이 이런 날씨의 공기에 저장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
눈을 감고 유럽의 도시들을 떠올려봤어. 몇몇 도시들. 몇몇 장면들. 몇몇 순간들. 도시의 풍경을 떠올리다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도시의 전반적인 이미지가 색이나 재료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도시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관광지가 떠올랐던 예전에 비하면 관점이 도시 전체 또는 분위기로 바뀐 게 아닐까 싶어.
세상을 이루는 모든 재료와 색에 초점을 맞추고 산책을 시작해 봤어. 길을 걸으며 만나는 재료들을 손으로 만져보고 냄새를 맡고 두드려 보며 그 안에 뭐가 있는지, 지붕과 벽, 바닥이 어떤 색으로 조합되어 있는지, 어떻게 변해가는지 재료와 색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탐험해 나갔어. 다른 세상이 보이는 듯했지.
2022년 9월
도시를 이루는 색
리스본을 생각하면 흰 벽과 붉은 스패니시 기와지붕의 조합이 가장 먼저 떠오르고, 코발트블루의 아줄레주 세라믹 타일이 떠오른다. 파리는 무채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과 잿빛 징크 지붕의 이미지가 자동반사처럼 튀어나올 정도다. 퐁피두 센터를 둘러싼 파이프의 화려한 색은 클래식한 도시의 이미지를 현대적으로 바꾸어주는 역할을 한다.
토스카나의 금빛 평원 사이로 붉은 양귀비꽃과 사이프러스 나무가 이루는 대비는 강렬한 이미지로 머릿속에 남아 눈을 감고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시에나의 건물들은 여러 톤으로 뒤섞인 적갈색 돌이 중세 도시의 우아함을 더하고, 해가 질 무렵이면 점점 붉게 타올라 도시 전체의 색이 달라진다. 볼로냐의 오렌지색 회랑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도시를 따라 끊임없이 이어져 도시 곳곳에 생기를 불어넣어 밝고 젊은 에너지를 만든다.
모두 도시를 이루는 기본 색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문득 서울은 어떤 색이 연상되는지 생각해 보다가 중심이 되는 색을 찾아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을 제외하고 현대적인 건물들로 채워진 뉴욕 같은 도시들도 서울과 마찬가지로 떠오르는 색이 없다. 만약 있다면 택시나 버스 색깔 또는 도시의 상징색 같은 인위적인 것들이다. 유럽의 도시에서 색은 재료로부터 나오고, 재료는 그 지역에서 태어난 것들이 대부분이니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도시의 색은 지역성을 대표하는 특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모든 도시는 다른 배경을 갖고 있으니 우리 도시와 비교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이다. 중심 되는 색이 없다고 하더라도 도시 풍경은 온갖 재료와 색으로 가득 차 있으니 그 다양성에 집중해 보는 것도 좋겠다. 대표적인 재료와 색이 없을 뿐이지 함께 섞여 있는 모습을 보고 ‘이것은 우리의 고유한 풍경이다’, 이런 생각이 들면 그것 또한 도시의 색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도시의 재료와 색을 산책하다
문을 열고 9월의 선선한 공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햇빛에 반짝이던 바닥의 반짝거림이 가까이 가 보니 누가 흘리고 갔는지 물이 흩뿌려져 때마침 빛에 반사된 거였다.
풍경과 햇빛, 나 사이에 만들어지는 관계는 참 오묘하다. 조금만 비껴서 보거나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 보면 그 반짝임은 사라져 있다. 눈에 보이는 세계란 수많은 우연들이 합쳐진 결과다. 평범한 것도 햇빛을 받으면 보석같이 아름다운 존재가 된다. 문득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유리구슬이 떠올랐다. 지나고 보니 햇빛에 갖다 대 보고 이리저리 굴려보며 빛을 탐험하고 있었던 거였다. 빛이 구슬을 통과해 반대편에 있는 바닥과 벽으로 이미지가 투영됐다. 구슬 속에 있던 기포와 무늬, 색이 스크린에 영상이 찍히듯이 바닥과 벽에 펼쳐졌다. 구슬 속 세계는 밖으로 나와 몇 배 더 아름답게 확장해 나갔고, 아주 느리지만 빛의 움직임에 따라 투영된 이미지의 모습도 달라져갔다.
돌과 콘크리트처럼 단단히 제자리를 지키는 재료들로 세상이 이루어져 있지만, 우연히 만나게 되는 순간들처럼 말랑말랑한 틈새도 있다. 그래서 풍경에 우연이라는 변칙적인 것이 들어가면 같은 사물과 장소라 하더라도 오늘의 햇빛과 바람, 시간, 기분까지도 풍경에 투영되어 모든 산책은 유일무이한 경험이 된다.
아파트 상가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려던 참이다. 철제 난간에 손을 얹고 가볍게 스치듯 하며 걸어 내려갔다. 가을 아침의 공기에 차갑게 식은 난간이 몸을 더 차갑게 만드는 듯하다. 이 차갑고 단단한 재료는 어디에서부터 왔을까? 어느 광산에서 채취한 철광석으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 땅 속에 묻혀 변화를 거듭하며 태어난 철광석이 뜨거운 용광로 속에서 순수한 철로 남아 가공을 거쳐 난간의 형태로 이곳에 도착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과 열기는 어딘가로 증발해 그냥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난간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담담히 서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난간을 바라보니 자연에서 온 재료들의 역사는 사람보다도 더 오래되고 구구절 한 것 같다. 그럼에도 모두들 담담히 그 자리에 서 있다. 사람이었다면 생색을 내고도 남을 이력일 텐데……
건널목 앞에 서서 신호등의 타이밍을 가늠해 보다가 초록 불이 켜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횡단보도를 건넌다. 처음부터 목적지를 정해놓진 않았지만 지금 막 산책 루틴이 결정되었다.
한층 높이의 계단을 내려가 산책로에 들어섰다. 햇빛이 정면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가을 햇살이다. 도로 아래의 작은 터널에 들어서니 하얀빛 속으로 들어간다는 감각이 들었다. 마치 화이트 홀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느낌. 흰색은 바탕이기도 하고 여백이기도 하고 무無, 없음이기도 하다. 그리고 채움이기도 하다. 빛 속을 통과하니 그 끝에 산책로의 풍경이 이어졌다.
산책로 옆 나무에 붉은 열매가 매달려있다. 꽃이 피고 잎이 나고 열매가 열리는 동안 나무는 같은 모습인 적이 없었다. 이제 단풍이 지고 낙엽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는 모든 단계를 밟으면 사계절의 나무를 모두 보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만든 재료들에 비해 자연의 재료들은 스스로 색을 바꾼다. 그들이 숨 쉬고 살아가는 지극히 당연한 일상이 색의 변화로 드러날 뿐이다.
화단과 산책로는 경계석으로 나뉘어 있다. 어느 채석장에서 캐낸 화강암을 가공한 석재일 것이다. 경계석은 서로 다른 재료가 만날 때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카드이기도 하다. 흙은 흙대로, 산책로는 산책로대로 자기 영역을 지킨다.
꽃과 풀에 손바닥을 갖다 대며 상쾌한 냄새를 맡으며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작은 다리 앞에서 멈춰 섰다. 목재 기둥을 손으로 한번 쓰다듬어 본다. 숲에서 자란 나무를 건조하고 재단해 가공 처리한 목재가 하천 위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어 있다. 비와 습기에 최대한 버틸 수 있게 그 위에 약품으로 코팅이 되어 있다. 나무는 하천 위를 연결하는 다리가 된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숲에 서 있는 나무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자니 난간을 생각했을 때에 비해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감정이입 끝에는 늘 양가적인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머리를 가볍게 흔들어 생각들을 날려버리고 산책을 이어나간다.
다리를 건너 아파트 정원을 가로지른 다음, 상가들이 밀집되어 있는 지하철역 앞으로 빠르게 걸었다.
플라스틱, 유리, 비닐, 시멘트 보도블록, 아스팔트, 점토블록, 폴리 카보네이트…… 역 방향으로 갈수록 재료들은 점점 인공적인 분위기로 바뀌어갔다.
잠시 상가 건물에 들어가 벽과 바닥의 화강석을 만져본다. 매끈하다. 조금 거친 표면도 있다. 빛이 머물다간 자리가 미지근하게 데워져 손 끝으로 따뜻함이 전해져 온다.
역을 지나며 7~10층 규모의 상가들이 사라지고, 5층짜리 근생과 상가주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건물과 길의 스케일이 달라졌다. 유리와 패널, 금속의 재료들이 벽돌과 돌, 노출 콘크리트로 재료가 바뀌며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서 태어나 이곳에 자리를 잡고 도시의 풍경을 이루고 있는 재료들에 마음이 쓰였다. 골목길을 걸으며 왠지 벽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손으로 스으윽 벽돌을 만져본다. 까끌까끌. 손에 고운 가루가 묻어난다. 벽돌 한 장 한 장 쌓아 올린 벽의 그 축조됨이 겉으로 드러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한 발 한 발 페달을 밟아 나아가는 자전거처럼 그곳에 성실한 충족감이 스며있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가 공중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흙냄새, 나무 냄새, 콘크리트 냄새, 벽돌 냄새, 금속 냄새, 플라스틱 냄새, 고무 냄새…… 재료들의 냄새가 뒤섞여 신도시 특유의 ‘새것’ 냄새가 공기 중에 흘러 다니고 있다.
좋은 땅들은 (부동산 가치의 관점에서) 이미 공사가 완료되고 임대가 되어 사람들과 상가들로 채워져 있지만 그렇지 않은 땅들은 아직 비워져 있다. 공사 중인 건물 앞을 지나는데 공사 가림막의 오렌지색 천이 빛을 받아 찬란하게 색을 드러내고 있다. 건물이 완성되면 곧 걷힐 짧은 운명의 입면이지만 지금까지 걷는 동안 가장 강렬한 색이다.
일요일 오후, 인적이 끊겨 거리는 한산하다. 골목 끝에 붉은 네온으로 새겨진 가게의 이름이 ‘지이잉’ 소리를 내며 어둠 속에서 갑자기 떠오른다. 네온의 색과 빛은 강한 임팩트를 주곤 한다. 몽환적이고 모호하고 비밀스럽고 미스터리하다. 어둠 속에 건물들의 입면을 지우고 네온사인만이 거리에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다.
또각또각. 주택가를 걷다가 뾰족하고 경쾌한 발자국 소리가 어디선가 점점 다가오는 듯 해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소리가 시작되고 있는 근원지인 신발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천천히 걷는다. 길과 하이힐의 굽이 부딪히고 바로 이어 신발의 앞부분이 부딪히며 ‘또각’ 소리를 낸다.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발소리는 비어있는 동네의 골목에 울려 실제보다도 더 크게 소리가 증폭되어 울리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재료 자체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소리를 내는 주체의 재료와 소리의 바탕이 되는 재료가 만나 마찰을 일으키며 공기 중에서 소리가 공명하는 것이다. 이럴 때 재료의 소리는 재료 본연의 속성을 잘 드러낸다. 날카롭거나 둔하거나 무겁다거나 가볍다거나 하는 식으로 소리를 감각하며 소리의 주체가 되는 재료를 상상할 수 있게 된다. 돌 위를 걸으면 단단하고 명료하고 울림이 일고, 목재 데크 위를 걸으면 좀 더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목재패널끼리 부딪히며 삐걱이는 소리가 들린다. 매끈한 바닥 위를 걸으면 소리가 깔끔하고 규칙적이고, 울퉁불퉁한 바닥 위를 걸으면 거칠고 불규칙적이다. 자갈과 모래처럼 움직이는 재료 위를 걸으면 그만큼 속도가 느려진다. 움직일 때마다 자갈들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소리까지 더하면 고정된 바닥 위를 걸을 때에 비해 소리에 여백이 없다.
재료는 어떤 장소에 있는지에 따라 우리에게 전달되는 소리가 다르게 감각될 수 있다. 광장에서 소리는 증폭되어 웅장하게 울려 퍼지고, 좁은 골목길에서는 작은 돌 하나가 굴러가도 예민해진다. 소리의 스케일과 분위기가 달라진다.
소리를 흡수하는 재료들도 있다. 유럽의 집들은 천장이 높은 공간들이 많아 울림이 크다. 이를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닥에 카펫을 까는 것이다. 카펫의 모 사이사이로 소리가 흡수되어 소리를 꿀꺽 삼켜버린 듯 방 안의 울림이 달라진다.
재료를 소리로 감각하는 것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는 것만큼이나 도시와 공간 디자인에서 중요하다.
재료에 초점을 두고 도시를 산책하다 보면 세상이 온갖 재료들을 꼴라쥬 해 펼쳐놓은 양탄자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혹은 재료들을 조각조각 이어 붙인 하나의 커다란 패치워크 같기도 하다.
재료 속에는 인류의 역사와 시대의 흐름, 문화와 기술, 사람들의 지혜와 어리석음, 그 모든 것들이 스며있다.
인류가 발굴하고 가공하고 상품화시킨 재료, 장인에 의해 하나하나 손으로 다듬어 만든 재료, 거푸집에 넣고 찍어낸 재료, 작게 파쇄된 재료들을 뭉쳐 하나의 덩어리로 만든 재료, 자연으로부터 채취해 가공한 재료, 몇 번의 재활용을 거쳐 다시 한번 삶의 기회를 얻은 재료, 변형 없이도 그 자체로 재료인 자연의 재료들까지 세상은 재료들로 가득 차 있다.
모두 한 자리에 세상의 모든 재료들을 모아놓고 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산책을 하며 재료가 도시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잘 적응하고 있는지 보는 것이 더 흥미로운 일일 것 같다. 사람이 나이 들어가면서 주름지고 흰머리가 생기고 연륜이 쌓여가는 것처럼 재료도 시간 속에서 나이 들어가는 그 자연스러운 변화가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방금 스쳐간 풍경들 속에 여름 장마와 태풍을 겪으며 새것이었던 재료가 빛바래고 마모된 흔적들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가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 중에도 재료는 부식되고, 산화되고, 갈라지고, 벗겨지고, 색이 변해간다.
집안의 재료와 색을 산책하다
도시의 재료들을 산책하고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간다. 온갖 냄새가 손에 배어있어 손부터 닦아내고 싶어 욕실로 향한다. 코코넛 오일 향이 나는 비누로 거품을 충분히 내 손을 깨끗이 씻는다. 딱딱하고 거칠고 인공적인 도시의 재료들을 경험하고 난 뒤라 그런지 비누의 매끈함과 수건의 보송 거림이 기분을 편안하게 해 준다. 집의 안락함이 재료들을 타고 몸에 전해져 왔다.
아, 집이구나……
컵에 물을 따른다. 작게 원을 그리며 물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도자기 컵 안으로 흘러 들어간다. 갈증을 해소하고 나서야 정신이 들어 냉장고를 열어보며 저녁 메뉴는 뭐가 좋을지 생각에 잠긴다.
냉장고 안은 온갖 식 재료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채소와 과일, 두부와 낫또, 밑반찬, 김치, 막걸리, 맥주, 버섯, 양념들이 작은 그룹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다. 냉동고 안에는 피자, 만두, 우동, 나물, 떡, 먹다 남은 음식까지 나름의 분류에 따라 정리되어 있다. 요리가 되기 전의 재료들이 한꺼번에 모여있어 도시의 재료들을 탐험할 때처럼 하나하나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정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찾지 못하고 실종되는 재료들이 있긴 하지만 그런대로 냉장고 안의 재료들은 다소곳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팬트리 겸용 다용도실에는 감자와 양파 같은 채소와 바나나처럼 실온에 보관하며 후숙 해 먹는 과일들이 모여있다.
오늘의 메뉴는 부추와 호박, 깻잎, 고추를 넣은 야채 전과 버섯 전이다. 재료를 꺼내 다듬고 두 개의 볼에 재료들을 넣어 밀가루와 물을 넣어 섞어준다. 밀가루는 물과 만나 재료들을 하나로 뭉치게 해 주는 점성을 갖고 있다. 팬을 뜨겁게 달구고 기름을 둘러 반죽을 얇게 펼쳐 놓는다. 뜨겁게 달궈진 기름에 반죽의 겉 표면이 노릇하게 변하며 본격적으로 전 부치는 냄새가 올라오고 있다.
전을 접시에 담고 유리컵에 맥주를 따라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켠다. 주방에서 소파로 몇 걸음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주변의 재료는 완전히 다른 종류들이다. 주방의 가구들은 물에 강한 재료들로 이루어져 있고 거실은 그런 요구가 전혀 없는 공간이다. 바닥, 벽, 천정 모두 밖에 사용하는 재료와는 다른 실내용 재료들이다. 집 안은 바깥세상에 비해 비, 바람, 먼지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이다. 집을 채우는 가구와 소품들 역시 좀 더 친숙한 재료다. 유리, 스틸, 가죽, 플라스틱, 나무, 종이, 자기, 천…… 같은 재료여도 모서리 처리나 표면 처리가 부드럽다. 집 안의 재료들은 몸에 직접 닿는 부분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에 재료의 선택과 마감이 중요해진다.
세상을 만들고 세상이 되다
재료의 범위를 눈에 보이는 것 그 이상에까지 확장하면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재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이나 바람이 재료가 되어 에너지로 전환되고 뭔가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재료는
물건을 만들고 물건이 된다.
건축을 만들고 건축이 된다.
도시를 만들고 도시가 된다.
음식을 만들고 음식이 된다.
에너지를 만들고 에너지가 된다.
형태를 만들고 형태가 된다.
재료 없이는
세상의 시작과 끝도 없다.
의도된 시점으로 출발한 재료와 색에 대한 산책
재료와 색에 초점을 맞춰 세상을 바라보며 산책을 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 아무리 직업이고 관심이 있어도 세상을 그런 방식으로 낯설게 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의도로 탐험을 시작해 보면 낯섦 뒤에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낯섦은 분명 우리가 늘 보고 듣고 느끼는 일상적인 감각 바로 뒤편에서 느낄 수 있다. 그 익숙하지 않은 것에서 오는 이질감이 차이를 인식하게 하고 머릿속 세계에 작은 지각변동을 일으킨다. 모든 게 뒤섞이면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곤 하니까.
세상은 재료와 색으로 직조된 양탄자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