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책방 06.

화이트 크리스마스

by 이창우

폭설이라기보다는 크리스마스이브 저녁부터 꾸준하게 많은 눈이 내렸다. 달력은 메리 크리스마스를 기억하게 하지만 책방 주변은 가득한 눈이 전부다. 주변 상가도 달라지지 않았고 가게 앞 눈을 치우느라 좁은 길이 살짝 드러날 뿐이다. 자연스럽게 양쪽에서 눈을 치워놓으니 책방 앞은 하얀 눈으로 뽀얗다.


엄청난 눈이 내린 후에도 제설작업을 하지 않아 하얀 눈이 가득한 도로를 목격하고 내 눈을 의심한다. 평소에도 드문 자동차는 아예 다니지를 않는다. 사람들이 아슬아슬 미끄러운 자동차가 다니는 길로 움직인다. 차 없는 거리가 저절로 재현된다.


그 친구는 연락 없어?

누구 말하는 거야?

그림과 박물관에 푹 빠져서 도망갔다는 애.

도망은 무슨 재현이도 탈출한 거야.

재인아, 네 친구들은 어째 하나같이 비현실적이니. 한국 탈출?

현실적인 친구도 있잖아. 정선희.

여기도 눈이 넘쳐서 짜증 나. 책방 구경 가려고 했는데.

나는 잘 지내고 있어. 화이트 크리스마스잖아.

짝이 있어야 크리스마스도 즐거운 거야.


그나마 아주 가끔 존재감을 드러내 스물을 기억하게 하는 두 사람 중 하나. 재현은 병역을 마치고는 후다닥 떠났다. 짝이 없는 내가 맞는 크리스마스는 서울 끝. 마침표 다음을 다시 시작한 것으로 자축하는 날이다. 여전히 부분 정리와 한쪽에는 쌓여 있는 상자들로 벽을 만들어 놓았지만 그것도 상관없다.


아무도 모른다. 내가 책방에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온통 하루가 내 것이 되니 24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노동하지 않는 삶이란 이렇게나 더디게 흐르는 시간을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책 읽는 것 말고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하는 일이 없다. 그것밖에 없는 나를 인정하는 일이 책방을 만드는 일이었다. 엄마 혼자 꾸려가는 서울 살림은 시간이 흐르면서 축소되고 있지만 부족하지는 않다. 아파트 평수가 줄었을 뿐이지만 여전히 혼자 살기에 넘치는 공간이다.


엄마도 나도 노동하지 않는 삶으로 말짱한 몸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자본이 주는 근본적인 차이다. 그러니까 나는 가족이 만들어준 기본소득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정기적으로 내 통장에 들어오는 엄마와 언니의 응원금. 이것이 기본소득이 아닌가. 한시적인 기본소득으로 나는 여유롭게 내 삶을 짓고 있다.


길냥이들에게 작은 친절을 보여줄 수도 있는 내 삶이면 괜찮다. 책방 문을 열고 들어와도 팔 수 있는 책은 100권 남짓이다. 내가 팔고 싶은 책만 가져다 놓았다. 안 팔리면 내 서가로 옮겨 놓고 내가 읽으면 된다.


엄청난 눈길에 길냥이들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물이 얼어붙는지 계속 확인하며 바꾸어 놓는 일이 오늘 주된 활동이었다. 어서 햇살 가득한 하늘이면 좋겠다. 길냥이에게, 책방 앞에 쌓인 눈 치우는 일이 하기 싫은 내게도 좋은 일이니까.


천냥하우스에서 사다 놓은 작은 트리 바구니가 깜박인다. 이재인,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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