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 연구모임 사회비판과대안 엮음
이른 아침 갑자기 눈을 뜨는 순간이 있다. 아무 자극 없이, 알람을 켜둔 것도 아니고 오직 주변에 공기같이 놓인 적막. 꿈을 꾼 아침이다. 이런 아침은 생생하게 꿈이 온몸을 휘어 싸고는 한다. 오늘이 그랬다. 내 꿈속에 등장한 친구와 또렷하게 나눈 이야기와 상황에 전화를 건다. 대개는 카톡을 하거나 문자를 보내곤 하는데 그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목소리를 듣고 괜찮은지 안심하고 싶은 마음. 그런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
상상한다. 평소 그의 일상을 생각해 보고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군. 꿈이 마치 무슨 징조인 것처럼. 이십 대에는 프로이트식 해석을 한다고 ‘꿈의 해석’을 공부하고 거의 맞지 않았던 꿈 해석에 신경을 쓰기도 했다. 나는 꿈을 잘 꾸지 않는다. 숙면하는 편이라 나무토막 같다고 할 정도로 잠귀가 아주 어둡다. 그래서 이렇게 꿈이 생생하게 기억나면 그냥 무시하지를 못한다.
2018년은 미투운동 뉴스로 출렁거리고 있는데 심장박동이 뜻밖에 안정을 찾는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동안 나도 #MeToo를 하는 피해자만큼 #WithYou에 더 단단하게 준비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글자 그대로 아무도 없이 혼자인 사람은 거의 없다. 가족과 친척, 사회생활에서 이어지는 주변인들. 작은 공감대로 모이는 집단, 나의 생존을 위해 자주 찾는 동네 마트와 중국집 배달 아저씨 등 무수하다. 그런데도 나는 혼자 사는 사람인 것은 맞다.
혼자 있는 것의 여러 방식 중 어떤 모양새를 취하는가는 개인이 선택하는 문제 같긴 하다. 나는 남성과 여성, 나이, 기혼과 미혼, 사회에서 구분하는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혼자 사는 사람'들을 ‘특권층’으로 지칭한다.
다양한 방식의 삶에서 개인이 얻는 즐거움도 그 정도가 다르듯 자기 삶을 사는 데 가장 많이 자기에게 한정된 삶의 시간을 쏟을 수 있으니.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은 사랑을 느낄 수 없었던 시간이었다.
가족은 개인으로 모여 있는 공동 거주지에 국한되었고, 맞벌이를 하던 부모의 충실한 책임감에 힘입어 현실에서 평온하게 지나온 시절이었다. 살아나기 위해 내가 선택한 적극적 방어는 사랑하기였는데 먼저 사랑 내어주기였다. 대부분 사랑을 쏟은 대상은 책이었다.
그리고 생명체를 대상으로 할 때는 주는 사랑을 선택해서 첫사랑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방향성을 보여준다. 짝사랑이 주를 이루었던 것 같다. 그런 과정에서 한정된 대상보다는 포괄적 사랑, 대상 확대로 인류애는 상실감을 상쇄할 수 있었다. 그 선택은 탁월했다는 생각인데 이제까지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것을 보면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해야겠다.
사랑 내어주기가 또 다른 결핍장애라 말하기 어려운 것은 그 결핍이 오히려 삶에 충족을 가져온 면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결핍을 안고 살면서 혼자 있는 시간에서 외로움을 만든다. 그것도 끌어안아 처절하게 외로워진 후에는 외로움이란 말은 금지어가 된다. 금지어를 만드는 이유는 그 말 대신 다른 대체 표현을 찾아내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외로움은 대부분 내가 홀로 있을 때 느껴지는 홀로 있음일 텐데 혼자 보내는 시간이 언제부터인가 쾌락을 동반하게 되었으니까.
찬란했던 시간이라 부를 수 있는 시절이다. 지나온 시간과 남은 시간을 생각하면 찬란함은 찰나이다. 그것은 언제이건 일상에서 먼지로 뒤덮일 수 있다. 찬란하게 지속할 수 있거나 그렇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은 현실을 벗어나지 않을 때이다. 지나온 시간이 그리움으로 남아 야금야금 나를 그 시간대로 이끈다.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해 주어 작은 웃음을 짓게 한다.
혼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혼자 있다는 것과 친근함을 나누는 사회에서 부여한 관계 맺기는 내 필요에 의한 것이 대부분인데 그것을 충족하는 일도 자연 발생으로 진전되는 대상에 머물 뿐이었다. 혼자(alone) 있는 것이 외롭다(lonely)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차리면, 고독은 삶의 여백을 채워주는 원동력이 되어 준다.
혼자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만나는 감정이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가는 꽤 중요했다. 그 흐름의 방향이 밖으로 향하게 될 때 세상은 나를 괴물 취급했다는 기억이 더 많았다. 내 시선이 멈추던 주변을 벗어나면 만나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였다는 생각을 이제야 하게 되는 것도 현재 놓인 시대가 주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라 받아들이고는 있다.
직업에서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했던 것은 근본적으로 내가 지닌 타고난 것인지 후천적인 환경에서 마련된 것인지 뚜렷한 구분 선은 찾아낼 수 없다. 주체적으로 거의 모든 일을 하면서 스스로 응원하곤 했다. 분명한 것은 내가 꽤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욕망의 전차를 타지 않았다고 해야 맞다.
삶에서 충족되어야 할 것들이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라면 좀 쉬울지 싶다. 내가 욕망하는 대상은 내게 쥐어진 돈의 양에 크게 넘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삶의 방식에 늘 붙어 다니던 꼬리표가 있었는데 좋게 말해줄 때는 이상주의자가 되었고 빈정거릴 때는 몽상가였다. 나를 어떻게 부르던 그것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일정 부분 누군가 내게 준 행운에 감사와 경의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행운아라 생각했기에 더더욱 삶에 욕심을 부리면 엄청난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강박은 늘 존재했다.
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세상사에서 사회제도의 문제, 정부를 이끄는 정치 집단의 문제, 탄핵되기 전까지 대통령이라는 한 사람의 문제일까 생각해 본다. 그 문제들이 다 해결되어 정권이 바뀌었고 사회 제도가 바뀌면 세상은 더 나아질까. 조금은 다르게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알 것 같다. 하지만 그때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투운동처럼 짓눌려 숨겨져 있던 문제들이 정신없이 폭발음을 내고 있다. 세상사 문젯거리는 인류가 생존하면서 되풀이될 수밖에 없지만 조금은 나아진다는 희망을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 결국, '특권층'의 변화, 한 개인이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웬만하면 혼자 사는 사람으로 있을 때 세상사를 도모해 보면 어떨까도 싶고.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악의 평범성’이 사회를 관통하고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악은 극악무도한 범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니까. 악은 일상에서 혼자 있을 때 가장 덜 저지르게 되지 않던가? 물론 특권층이라 하고 싶은 혼자 사는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으로 한 집단을 지적장애 증상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국정농단과 부정부패. 그에게 권력을 줘 내부 분노를 밖으로 분출하도록 선택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사회에서 악의 평범성으로 선택권을 준 공동체는 대부분 무너져 내렸다. 악이 번지는 것은 혼자 사는 사람이 관계 맺기에서 의미심장함을 기억하게 하는 적절한 사례이다.
2018년 확산되고 있는 #MeToo와 #WithYou 운동처럼. 그래서 혼자 사는 사람은 관계 맺기를 잘 선택해야 한다. 자기 존재를 관통하며 흐르는 것에서 진실이 무엇인지를 아집으로 차단해 버린다면 진정한 자기를 잃게 되니까.
자기 상실감은 악의 평범성을 확대하는데 몰두하게 되는 괴물을 만든다. 웬만하면 혼자서도 잘 사는 사람, 한 사람으로 온전히 살아가면 싶다. 나의 선함이 세상을 향해 열리고 조금은 변화될 좋은 세상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니.
"과연 나는 주체로 살고 있는가? 내 앞에 있는 대상을 주체로 여기고 있는가?"
페미니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나’를 마주하고 어떤 지점에서 물음표를 던지게 된다. 다만 한 가지 사실로 분명한 것은 내가 여성이라는 점이다.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를 지나온 세월에서 ‘여성’보다는 ‘인간’으로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며 살아욌다.
‘인간’이란 말에 ‘여성’이 인식된 것은 아니었다. 서구 사상에서 얻어온 지식들이 자연스럽게 사회 학습 과정을 거쳐 내게 여성이기보다는 인간이란 말로 스며들었던 것뿐이다. 고전문학에서 만난 그 시대 주인공들에게서. 그것이 왜 문제인지를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 답을 찾아가며 공부하고 있다.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내 기억들은 나를 망치로 치며 부수고 뭉개고 있다. 페미니즘과 관련된 책을 읽고 현실에서 수다를 떤다. 모든 성평등을 지향하는 페미니즘은 사회 구조로 자리 잡은 성차별에 문제를 제기한다. 사회구조에 흔들리지 않을 주체성과 자기 위치에 놓인 페미니즘 이론으로 접근해 간다면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이다.
나는 끊임없이 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로 ‘나’를 설명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한 걸음 더 내딛는다. 최근에서야 만난 페미니즘 철학자 이리가레의 존재론적 차이로서 성차 개념은 페미니즘과 나 사이에 끼어들어 ‘여성’인 나를 알아차리게 한다. 여성으로 주체적으로 살아온 나는 이제야 좀 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남녀 모두가 제1의 성도 제2의 성도 되는 일 없이, 차이 나는 두 성으로서 주체이자 타자가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뤼스 이리가레의 목표다.
-『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 뤼스 이리가레 / 황주영-
『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은 문성훈, 황주영, 조주현, 김은희, 이봉지, 김원식, 고지현, 이현재. 8인이 접근하며 말하고자 하는 현대 페미니즘 이야기다. 시몬 드 보부아르, 뤼스 이리가레, 샌드라 하딩, 캐롤 길리건, 엘렌 식수, 아이리스 매리언 영, 주디스 버틀러, 깁슨-그레이엄의 여덟 가지 목소리를 담았다. 그 많은 페미니즘 이야기를 접하면서 이 책에서 내가 주목한 대상은 뤼스 이리가레다.
페미니즘은 개인이 딛고 있는 자리에서 스스로 알아차린 자기 정체성으로 다양한 층위로 접근하여 상호 작용하는 이론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차곡차곡 쌓인 그 많은 페미니즘 관련 공부를 평생 벗으로 삼기로 한다. 나는 이제야 과부하인 뇌가 아니라 내 몸과 마음으로 돌아와 느긋하게 글을 정리한다.
[덧붙이는 글]
굳이 연재 브런치북을 열어 2018년 써놓았던 글을 다시 들여다보고 묶어보는 일은 그 시절에서 한 걸음 내딛기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2023년에도 여전히 페미니즘을 탐구하는 공부가 내 삶을 더욱 단단하게 이끌고 있는 중심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혼란스러운 정체성에 몸살을 앓고 있는 사회 전 분야에 몸 담고 있는 개인들이 통찰력을 모아야 할 간절한 때에 지난 시절 사유는 지금도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