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마이클 커닝햄
맑고 차가운 기운이 창으로 와 깨우는 아침이다. 바흐의 칸타타 211번이 흐른다. 나는 어느새 잠이 들었던가 제 스스로 멈출 수 없는 무한반복을 해놓아 마침 순서가 된 커피 칸타타.
오늘 이 하루가 어느 시대 누군가의 하루로 이어질 수 있을까. 바흐의 음악을 들으며 한 번쯤 기억해 낼 수 있을까. 회상에서 얻는 감정은 아련하기도 하다. 치유하지 않고 깊숙이 묻어버린 감정은 아직도 살아있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 작품으로 영화 <디 아워스>를 먼저 보고 더 느끼고 싶어 원작까지 읽으면 오랫동안 세 명의 여인이 가슴에 남는다. 이 책도 그렇게 닿은 사물이다.
사물. 그 안에 담긴 세 여인의 시간.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공간은 다르지만, 그 어느 날 이야기에서 존재를 배운다. 구분되어 불려야 하는 존재. 중심을 뚫는 고통.
댈러웨이 부인과 울프 그리고 브라운 부인이 보낸 그 하루가 버지니아와 로라, 클래리사로 남은 그 세월에서 시공간을 넘나들며 전개된다.
세상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없었던 세 여자의 삶은 어쩐지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공허함마저 배운다. 그다음 이어지는 세월은 허공에서 부유하는 존재로 현실에 가까스로 남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나의 시간. 또 그대에게 주어진 시간. 우리라고 부를 시간이 많이 쌓여 있다면 나는 시간여행자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 시간은 이성보단 감성이 더 많이 투영된 순간들일 테니. 이성이 부족해서 겪는 현실적 고민들은 실상 감성의 결여가 원인인 경우가 더 많았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가능하다.
아무래도 적은 이성의 힘과 넘치는 감성의 힘으로 내 시간은 존재해 온 것 같다. 이성적이라면 난 좀 더 나은 선택을 했을까. 실패하지 않는 죽음처럼. 하지만 과연 죽음에 달 이유가 있을까. 내가 선택한 것에 모두 이유를 달고 싶어 하는 죽음이어야 되는 건 아니다.
갑자기 찾아온 죽음을 막을 수는 없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죽음. 탄생도 그렇다. 나는 내가 태어날 줄 전혀 몰랐고 세상에 나와서도 왜 태어났는지 잘 모른다. 삶이든 죽음이든 시작도 끝도 아니다. 한 점에서 출발된 것이라면 그 점이 더는 보이지 않는 것을 죽음이라 이름 붙인 것일 뿐이다.
시간이라는 그 찰나가 눈에 선명하게 보이다가 점점 흐릿해져서 사라진다 한들 그게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 점은 하늘을 바라보면 언제나 찾아낼 수 있는 점이니까. 그 점을 확대해서 질리도록 우려먹어 삶이라는 이름으로 만들기도 한다.
삶이라는 제목에 굳이 흔적을 남겨야 할 것도 아니다. 스스로 확인하다가 살아있음 그것이 벅차면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 어떤 점으로 있건 그건 내가 부르고 싶은 이름으로 불릴 뿐이다. 수많은 말과 소리와 글로. 또는 이미지로.
세상에서 여러 모습으로 살아가는 일. 지금 여기와 그 어느 날과 또 다른 그 어느 시간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삶이라면 그 삶은 살아나고 싶은 욕망으로 넘칠 수 있어야 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내 언니와 연상된다. 현실과 또 다른 세계.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던 언니의 현실은 실상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시간이다.
내 언니는 홀로 누구도 필요치 않은 자기만의 방에서 자기만을 위해 살고 있었다. 서른이 되면서 닫아걸어버린 자물쇠.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는 세계. 그 안에 나도 있었던 걸까.
언니는 두 세계에서 나를 알아보고 따뜻하게 부르고는 한다. 결코 나는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가장 아팠던 시간이었다는 것을 불행으로 여기지 않는다. 내 기억에 남아있는 언니로 충분한 존재다.
버지니아 울프의 '델러웨이 부인'을 징검다리로 삼아 시대를 초월하는 의식들에 대해서 고민해 볼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언젠가는 상상하는 그 힘으로 세상은 나아질 수 있다.
커닝햄의 ‘세월’과 영화 ‘디 아워스’와 함께 누리다 보면 이미지가 서로 교차하면서 ‘나’라는 존재를 생각할 허공이 마련되기도 한다. 그 허공에 빼곡히 글자가 쌓인다.
한국 버지니아 울프 학회에서는 울프의 작품을 다시 연구하고 번역해 발간하고 있다. 나는 이십 대에 버지니아 작품을 따라 길을 걷는 순간을 다시 발견한다.
버지니아의 독백이 세기를 넘어 내게로 왔을 때 그 고뇌가 온몸으로 파고들었던 그 물음들이 다시 되풀이된다. 문학을 통한 버지니아와 만남은 세월을 지나 여전히 현재에 놓인 그대와 나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우리는 왜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가?
이 시대에서 여성의 삶은 어떤 의미인가?
내 삶은 사회적 관습에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