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시작
“너 당한 것 같아. 빨리 경찰서 가서 접수해. “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더 정확할 지도 모른다. 평생 빚 한 번 지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성실하게만 살아온 내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을까. 머리 한가운데가 뻥 뚫린 듯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친한 친구의 목소리조차 타인의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다른 친구에게, 친한 동료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설명하며 급하게 돈을 빌려달란 말을 하던 내 모습, 내겐 너무 낯설게만 다가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돈을 빌리진 못했다. 적은 금액이라면 어떻게든 해보겠는데, 워낙 큰 금액이라 다들 난감해했다.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노트북 화면 속 글자들은 수면 위를 빙빙 도는 나뭇잎처럼 내 눈앞을 의미 없이 빙빙 돌기만 했다. 심장은 요동쳤고, 난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멍한 표정으로 노트북 화면만 응시하는 내 곁을 지나며 친한 사람들이 물었다.
“안색이 안 좋으세요.”
“어디 불편한 것 아니세요? “
“무슨 일 있으세요? “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구를 믿어야 할지,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아 그저 입을 닫았다. 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긴 어렵고 고통스러웠지만, 돌다리를 두드리는 심정으로 경찰민원 앱을 켰다. 하지만 접수조차 원활하게 할 수 없었다. 방향을 잃은 내 머릿속 상황처럼 앱마저 먹통이었다. 결국 직접 경찰서로 향하는 방법말고는 없었다. 팀 선임에게 급한 일이 생겨 먼저 가보겠다고 말하자,
“얼굴이 많이 안 좋네, 무슨 일 있어?”
“알았어 일단 들어가서 좀 쉬어.”
라고 말하시는데,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아무도 믿을 수 없었기에,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말을 아껴야만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택시를 잡아타고 도착한 경찰서에서, 상주직원의 도움으로 겨우 사건을 접수했다. 그 후 안내창구로 가니, 죄송하지만 본관으로 가셔야 한다고 다시 안내를 해주었다. 긴장한 발걸음과 함께 본관 안내실에 도착한 후, 직원분의 안내를 받아 본관 1층 민원실로 들어갔다. 10여분 기다리니 담당 경찰관님이 오셨고, 간단한 인적사항 확인 후 서류를 건네드리니,
"오늘은 돌아가서 쉬시고, 사건 담당 경찰관님 정해지면 조서 일정을 별도로 잡을 거예요."
라며 내게 얘기해주셨다. 이미 일과시간이 지난 후라 발걸음을 돌려 경찰서를 나왔다. 6월의 어느 날 저녁 6시가 갓 지났지만 태양은 여전히 뜨거웠다.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지', '난 무슨 일을 한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돼서 내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라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6월의 시린 열기]
막막한 마음이 너무 컸기에, 그냥 걷기만 했다. 걷는 내내 발걸음은 묵직했지만, 발등으로 전해지는 뜨거웠던 여름 지면의 열기는 시리도록 차갑게만 느껴졌다. 가슴이 조여와 목적지도 없이 일단 몇 정거장을 그냥 걸었다. 거리 위 사람들은 평온한 표정이었고, 세상은 평일 저녁 퇴근시간의 훈훈함이 가득했다. 친한 부서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벨이 몇 번 울리지 않고 통화가 연결되었다.
"저 당한 것 같아요.."
"...(긴 한숨)..... 어쩌다가... 왜... 왜 네가..."
"... 그러게요..."
......
핸드폰으로 전해지는 선배의 먹먹한 목소리에 참았던 울음이 나올 뻔했지만 가까스로 마음을 달랬다. 긴 통화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린 발걸음,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나는 무얼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것일까.', '이게 내가 원하던 인생이었을까.' 하는 생각들.
살면서 여름이 이토록 시린 계절이었나 싶을 만큼, 그 해 6월은 내겐 너무 잔인했다. 단순히 돈을 잃은 것보다, 사람에 대한 예의와 신뢰가 무너졌다는 사실에 나는 무참히 짓밟힌 기분이었다. 아무도 믿을 수 없었기에 나 자신이라도 믿어야 했지만, 오히려 나에게 가장 가혹해졌던 시간들. 나의 가장 시린 여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