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버린 마음에 대하여
나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디가 아픈지도 모를 정도로 멍했고, 공기조차 어색한 시간들이 계속 흘렀다.
선생님은 이미 한참 공허한 나의 상태를 지켜보며 기다려주고 계셨다.
그리고 조금 힘겹게 꺼낸 나의 첫마디는
“지금은 왜 눈물이 안 날까요.”였다.
나는 분명히 힘들다.
숨이 막히고, 답답하고,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는데 이상하게 눈물은 나지 않았다.
예전의 나는 잘 우는 사람이었다. 흔들리면 바로 울컥했고, 억울하면 말보다 눈물이 먼저 나왔던 사람.
선생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침묵은 판단이 아니라, 기다림이었다.
“가슴이 답답하긴 해요. 숨이 안 쉬어질 때도 있고… 그냥, 너무 갑갑해서 사라지고 싶단 생각이 드는 날도 있어요.”
이건 분명 고통인데, 왜 이렇게 무표정한 감정으로 말하게 될까.
무언가가 얼어붙은 상태. 그게 내 안의 정확한 감촉이었다.
“이전에 아주 어릴 때나 그런 경험이 있었나요? 마음은 너무 힘든데, 눈물은 나지 않고, 대신 생각이 다 사라진 것 같은 느낌.”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단지 이번에는 더 확실했다.
모든 생각이 사라진 게 아니라, 말할 권리를 빼앗긴 것 같은 감각.
심리학에서는 이를 감정 서사의 단절, 혹은 감정 해석권의 상실로 설명할 수 있다.
관계가 정리되지 못할 때, 감정은 말이 되지 못한 채 내면에 갇힌다.
실제 학문에서는 “narrative disruption”이라는 용어가 트라우마 심리학, 자기 서사 이론(self-narrative theory) 등에서 사용된다.
그 빈칸이 너무 크면, 우리는 감정을 차단하기 시작한다.
슬픔도, 분노도, 억울함도 모두 말이 되지 않으니 결국 표현을 멈추는 방식으로 감정을 보존하려 한다.
그건 감정의 마비다.
“눈물이 안 나는 건, 감정이 마비된 상태일 수도 있어요. 몸이 자기 보호를 위해 감정을 잠시 보류한 거예요.”
감정 없는 상태조차도, 감정의 일종일 수 있다는 말에 이상하게 위로를 받았다.
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먼저 지워냈다.
나는 그게 너무 강한 통제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네가 무슨 감정을 느끼든, 이제 나는 상관없다”는 식의 일방적 선언이었고, 나는 그 앞에서 어떤 감정도 꺼낼 수 없었다.
그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해 선택했다고 말한 그 침묵은 나의 존재를 무력화시키는 침묵일 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여전히 울 수 없었다.
그 침묵 안에서 내 감정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눈물이 나지 않는 건, 괜찮아서가 아니에요. 무너지지 않기 위해 최후까지 버티고 있는 구조일 수도 있어요. 말하지 못한 감정은, 더 오래 남거든요.”
감정의 해석권을 독점한 사람. 나는 그런 관계의 잔해를 껴안고 감정 대신 혼란만 끌어안았다.
“그는 바다 씨를 지우려 했지만, 바다 씨는 내가 정말 사라진 건 아닌지 두려웠던 거죠.”
상담사님의 말이 정확히 내가 느끼는 공허함의 구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픈 것도 아니고, 분노도 아니고, 억울함도 다 지나가고 나면 남는 건 존재 자체가 불분명해지는 감각이다.
내가 눈물을 쏟지 않는 이유는 슬픔이 느껴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무너질까 봐였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감정은 ‘끝나서 아픈’ 게 아니라 ‘끝난 걸 이해받지 못해서 아픈’ 것이었다.
아무 말도 닿지 않는 안녕 앞에서, 말을 꺼내지 못했던 내 마음을 조금씩 복원해 가는 중이다.
눈물이 나지 않는다는 건, 느끼지 않는 게 아니라 너무 오래 감정을 누르고 있었다는 말.
그리고 나는 지금은 그걸 받아들이는 시간을 온전히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