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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wnscale Sep 14. 2019

싫은 여름이 끝났다

여름의 좋은 것들도 잠시 미뤄두었다

     오랜만에 꺼내 입은 자켓에 선선한 바람이 부딪혔다. 얘는 여름부터 불던 바람이 식은 것일까, 아니면 여름과 아예 다른 곳에서부터 걸어와 나에게 닿은 것일까 시덥잖은 생각을 한다. 어쨌든 더위가 끝났다. 여름 뒤에 그림자처럼 늘어져있던 꿉꿉함이 큰 비를 내리고 앞서 간 여름의 뒷꿈치를 쫓아갔다. 


     사계절 중 가장 싫어하는 계절은 여름이다. 덥고, 습하고, 예고 없이 내리는 굵은 빗줄기에 신발도 젖고, 가방도 젖는다. 모기놈은 새벽 2시 잠을 깨우고 나를 박수치게 한다. 공룡보다 오래 산 바퀴벌레는 믿기지 않는 속도로 움직인다. 뭘 입건 땀이 흥건하게 하고, 입맛도 별로 없다. 여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몇 kg은 빠지는 것 같다.


     여름이 마냥 싫은 것은 아니다. 여름의 쨍쨍한 햇빛을 에어컨 쐬며 창 밖에서 가만히 보고 있는 것이 좋다. 팥빙수를 먹으며 밖의 여름을 하릴 없이 감상하는 것은 좋다. 빗속을 걷는 것은 싫지만 카페 창가에 앉아 비 내리는 소리를 별 생각없이 듣고 있는 것처럼 좋다. 녹색 나무들이 줄 지어 심어져 있는 그늘 밑이라면 직접 걷는 것도 좋다. 나무 사이로 떨어지는 햇볕이 내 신발 윗등에 앉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순간이 좋다. 싫은 계절이지만, 그 계절에서도 내가 즐기는 것들이 있다. 


     싫은 것은 적을수록 좋고, 좋아하는 것은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을 한다. 좋아하는 것을 늘리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을 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싫어하는 것이라도 차근차근 보고, 듣고, 만져보는 것들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팥빙수를 맛있게 먹으며 여름이 아니면 몰랐을 맛이라고 생각한다. 그늘에서 보내는 여유로운 시간이 주는 묘한 안도감은 여름에만 느낄 수 있다. 긴 시간 땅 속에 있다 온 몸으로 우는 매미 소리에 가끔 머리가 멍-해지고 상쾌해지는 느낌이 든다. 조그만 몸일 지라도 필사적으로, 생애 마지막으로 우는 그 울음이 몇 십배는 큰 덩치의 시간을 뺃는다.


     싫은 여름이 끝났지만, 여름은 지구 한바퀴를 돌아 다시 돌아올 것이다. 다음 여름이 돌아오기 전까지 내가 싫어하고 타박했던 여름의 많은 것들 중 하나라도 좋아 하는 것으로 바꾸면 다시 만나는 여름도, 나도 조금은 더 사이가 좋아지지 않을까. 좋은 것만 보진 못해도, 좋은 것만 생각하진 못해도 좋은 걸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좋은 걸 가장 크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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