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 노인 모두가 싫어한다는 백작의 노인 이야기 10
두 가지 가치관의 영원한 혼돈이 너를 파우스트로 만든다.
모든 것은 경계선에 있다. 흑도 백도 되어선 안 된다. 물론 회색도 답은 아니다.
도대체 인간은 무슨 색이 되어야 하는 가.
젊은 아니 어린 시절, 한 번쯤은 파우스트를 들어 보았을 것이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으나 당시 사람들의
관점에서 봤을 때 매우 ‘앞서가는’ 인물이었다. 명성이나 재물보다 인식을 중요시하고 운명에 따르기보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지성인. 그러면서 악마의 유혹에 빠져 몰락하지만 진짜 나를 발견하고 실현해
나가는 인간을 대변하기도 한다.
필자인 나, 백작의 결론은 ‘경계’에 놓인 인간이 그 유혹에서 벗어나 어느 한쪽의 선택을 강요당하지 말고
‘경계’ 자체를 즐겨보라고 권한다. 물론 위험한 권유고 유혹이다. 특히 역설적으로 노인 사람에게 권한다.
어쩌면 연륜의 관록으로 유혹을 견디고 지고의 선에 이를 수 있는 경지, 그것이 진정한 ‘경계’의 본질 아닌가.
한도 내에서 넘치게
뭉텅이로 사람을 볼 때 느끼는 인간의 하찮음과 한 명 한 명 세세히 드려다 볼 때 보이는 경이로움이 교차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 묘미의 절정에 이르는 노인이야 말로 ‘오징어 게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 궤변 한다. 세상을 세세히 바라보면 아름다움과 가치 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반면 추악한 것 역시 가득하다. 혹 세상에 패배한 사람의 자기 합리화로 치부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뭐 어떤 해석도 다 괜찮다.
영화 ‘색계’와 ‘무간도’ 이야기
우연히도 두 영화의 주인공이 ‘양 조위’로 일치된다. 당시 홍콩의 정치, 역사적 상황에 무관하지 않게 상업영화의 경계 속에서 두 영화 모두 인간의 옳고 그름의 선에 경계를 긋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일차적으론 영화 ‘색계’에서 색은 남녀의 성욕과 사랑을 의미한다. 계는 이념의 경계, 역시 이념의 색깔을 구분하는 중복적 의미이다. 그러면서 또 정반대의 이미지를 대표한다. 영화 ‘무간도’ 역시 경찰 속의 깡패로, 깡패 속의 경찰로 사는 두 인간이 표면적으로는 ‘선’과 ‘악’이 구별되지만 내면으로 누가 더 ‘선’이고 누가 더 ‘악’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과연 어느 쪽이 더 강하고, 유혹적 일까? 더 파괴적이고 더 중독 적 일까? 그 ‘색’이나 ‘경계’가 뚜렷하기는 한 걸까? ‘색계’에서 양 조위는 분명 ‘악’이지만 ‘선’ 쪽에 속해있는 반정부 저항군, 주인공 여인에게 그 악과 선의 구별이 과연 의미는 있는지. 혹 우리의 삶도 그 경계에서 줄 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념이라면 이미 과거와 현대. 시대와 또 나라와 나라 간의 환경과 상황이 다르겠지. 공감과 이입이 잘 안 되지. 그러나 남녀의 색으로 말하면 시대를, 공간을, 국가를, 이념을 넘어 쉽게 공감하게 돼. 영화 속의 양 조위 같은 철저한 이념 주의자까지도. 여 주인공도 끝없이 갈등하지. ‘색’과 ‘계’ 사이에서. 배운 적도 없이 보수적인 시대에 태어나 학습된, 습득된 관념의 여성관까지 넘어 의미를 부여하는 이념의 경계 속에서. 결국 대중이나 관중, 관객도 그 경계와 색의 모호함을 어쩔 수 없어 기지 방어적 무기력에 빠지게 될 때, 그녀는 우릴 비웃듯 최종 선택을 하고, 우리를 바라보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 누가 더 고결한지. 따지지도 못할 시대에 쓸려, 끌려가며 사는 우리에게 스스로 그 ‘계’를 넘어 선택하는 자유인으로의 비웃음을 담고 있었다. 여 주인공의 관객을 향한 시선에서 우리는 섬뜩함 보다 연민을 느낀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거기서 나는 나의 정체성을 느끼고 한국인을 넘어 서양인 아닌 동양인이 된다.
경계에 서 있어도 육체를 이겨야 정신도 버틴다.
늙고 젊음보다 제일 먼저 체력이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인생은 강렬히 단 디저트를 먹고 그 느끼함을 쓴 커피로 중화시키며 두 경계의 오감을 즐기는 것이다.
때론 옳은 것과 쉬운 것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내가 그렇게 살면 되지 남이 그렇게 안 산다고
분노할 권리도 자격도 없는 것이다.
난 이 나라에서 둘로 나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싫다.
남과 북, 불교와 기독교, 전라도와 경상도, 친구와 가족과 이념과 고향과 학교와 모든 것들에 오백 년 유교의 폐해가 녹아있고 고스란히 우리의 DNA에 스며들었다.
어떤 날은 참으로 풍요롭게 아쉽지 않게 살아온 것 같고, 어느 날은 참으로 게으르고 나태하고 비열한 도망질에 탕진한 것 같고, 그저 저열한 충동으로 살면서도 그에 조차 만족하지 못한다는 ‘전혜린’의 날카로운 지적에 폐부를 찔려 무너진 날이 있었으나 나는 아직 오랫동안 살아있다. 가끔은 연약함도 힘이 될 수 있다.
모든 악, 나쁜 상황은 불균형일 뿐이다. 나이 듦. 조차 말이다. 모든 생명체의 관계란 이물질과의 교류를 뜻한다. 이 교류의 개념이 중요하다.
눈에 보이는 허구와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
경계선에서 살아보자. 빈곤도 부유도 싫다. 재산, 예술, 남녀, 정치의 색의 경계.
노인 사람들이여, 우리 한 번 함께 경계선에서 살아보자.
노인 사람, 친구들에게
나이들 수록 친구의 정의와 가치가 높아진다. 어린 시절 유년기의 그것과 다르다. 아쉽고 화나서 되는대로
내뱉은 글 같지만 내가 말하는 것, 권하는 것은 젊게 살자, 일을 더 하자, 돈을 계속 벌자가 아니다.
노인이고 뭐고 그딴 것 상관없으니 어른이 되어보자는 것이다. 성숙하고 교양 있고 멋진 어른, 우리 인간을
유일하게 정리할 수 있는 참 어른이 되어보자. 요즘 어른이 별로 없다. 애들은 아직 바쁘고 힘들 테니 그냥
놔두고 세월을 기다리자.
모든 것엔 양면성이 있고 차원까지 감안하면 다면성이 정답이다
음영, 선과 악, 하늘과 땅, 빛과 그림자, 남과 여, 젊음과 노화, 배트맨과 슈퍼맨, 남과 북,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 전라도와 경상도, 진보와 보수 등 늘 존재하는 양면은 원인이 아니다. 지식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다.
항상 그 한 면에 붙어 존재하며 대중과 사람을 싸우게 하고, 흥분시키며 정신과 육체를 갈취하는 것들이 가까이 있다. 인류 역사 내내 그들에게 놀아난 대중, 더 이상 시간과 열정을 낭비하지 말자. 대립은 해결할 답이 아니다. 끝없는 패망의 반복이고 그 틈바구니에 기생충만 포식하게 될 것이다. 그 양면은 함께 존재해야 하는 것일 뿐이다. 갖은 명분을 들어 그 대립을 주장하는 이들을 먼저 벌하라. 세상은 서로 싸우고 타락했지만 아직 인간은 선하다. 영화에서 조차도 ‘깨달음’은 가능하다. 인간은 끝도 없이 상대적 ‘경계’에 놓여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중인격을 보유하고 있다
지킬과 하이드, 햄릿과 돈키호테, 성악설과 성선설까지 동시에 공존하는 인간을 굳이 한쪽으로 가두려 하고 나누려 하니 탈이 나는 것이다. 균형감각과 컨트롤이 중요하다. 기다림까지도.
인간, 사람의 일생을 구분 짓는 ‘질’과 ‘급’은 그 경계는?
과연 그 ‘경계’는 무엇인가? 재산, 지위, 건강? 자식? 자본주의 국가에서 재산을 늘리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권장하고 높게 평가받아야 한다. 그런데 재산을 축적하는 과정의 오랜 관행 속 무의식 위법 요소가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이 핵심적 지적이다. 이율배반적 표현이 되겠지만 들추어지면 죄가 되고, 넘어가면 관례가 되는 ‘경계선’이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의 지도자인 고위 관직을 선출, 임명할 때마다 재산의 증식 과정이 문제가 되는 것은 소위 국민 눈높이의 기준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성공한 뛰어난 사람을 선출하는가, 아니면 청명하고 존경받을 인물을 원하는 가에 따른다. 즉 아직도 이념 전쟁을 끝내지 못한 채 전후 급 회복, 성장 통을 겪는 중인 것이다. 결국 21C에도 빨갱이를 거론하는 촌극이 타당하게 자리 잡는 현실이다. 다양한 해석과 이해, 포용이 필요한 문제를 국민의 눈높이와 배타적 콤플렉스를 비벼서 흑백 논리적 잣대를 들이대며 핵심을 찾지 못하는 안타깝고 목이 메는 수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