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두통의 강도는 오로지 그만 알 수 있다. 나는 잔뜩 찡그린 표정과 얼마의 간격마다 진통제를 삼키는 지를 재면서 남편의 두통이 더 심해졌구나를 가늠해야만 했다. 그래서 응급실을 갈지 말지 결정할 권한도 그에게 주었다. 괴로워하는 남편을 보며 "응급실 갈래?"하고 물으면 주사 맞는 것이 두려워 안 아픈 척하는 아이처럼 "아니야 아직 견딜 만 해"라고 실랑이하길 한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수면 외 나머지 시간은 간신히 눈을 떠 갈아 만든 주스 두 모금 먹고 다시 잠 속으로 도피했다. 구역질이 심해지니 씹는 밥은 어림도 없다. 펜타닐 패치(마약 진통제 패치_ 항암 환자의 조절되지 않는 진통에 쓰임)를 붙이고 자다가도 두통 때문에 깨면 다시 마약성 진통제를 먹고 잠들기를 하루종일 반복했다. 무슨 수를 내야 했다. 이때까지 '갈래?' 의문문으로 물어보던 것을 청유문으로 바꿨다.
"응급실 가자"
단호하게 말하니 남편은 눈을 감은 채 마지못한 듯이 대답했다."그래"
입원준비물 목록을 체크하며 짐을 챙겼다. 당장은 응급실에 가지만 입원까지 고려해서 짐을 챙겨야 한다. 두 번째 수술도 응급실에서 바로 입원처리되어 병실로 올라갔었고(현재는 3차 수술까지 진행되었다) 며칠 대기하다 수술대에 올랐으니 이번에도 그리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놓친 것은 없는지 살펴가며 시부모님과 함께 서울로 향했다. 시아버님은 운전하시며 가는 내내 걱정 어린 말씀을 하셨다.
"뒷산에 올라가 잠깐이라도 걸어야지 몸이 낫는다"
"난방비(시부모님이 내주신다) 걱정 말고 창문을 살짝 열어 놓은 채로 있어야 한다. 환기가 매우 중요하다"
"아비의 몸이 저렇게 심해졌으면 가족들에게 알렸어야지 너 혼자 어떻게 감당하려 그러냐"
"환자 본인이 의지로 병을 이겨내야 한다"
아버님께서는 하나뿐인 형님을 암으로 먼저 보내시고 아들마저 형님과 비슷한 나이에 암에 걸렸으니 아버님의 비통함은 나에 비할바가 아니다. 그런 아버님의 말씀이 구구절절 맞는 말임을 잘 알고 있지만 남편에겐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두통과 항암 부작용으로 21시간을 누워있고 집에서도 손이 얼음장이라 40도의 온수매트 위에서도 핫팩을 쥐고 있다. 22도의 실내에서도 코가 시리다고 코에 핫팩을 올려놓는 남편이 있는 안방을 환기시킬라 치면 그가 힘들진 않을지 상태를 봐가며 창문을 열어야 한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속이 쓰려도 아버님의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다. 건강에 있어선 원리원칙 주의자인 아버님에게 내가 말을 거들어봤자 핑계로 들리기만 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앵무새처럼 "네"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창밖으로 앙상한 나뭇가지의 가로수가 스쳐 지나간다. 나뭇가지 사이로 들이치는 겨울바람을 오롯이 감내해야 하는 겨울나무처럼 내 마음도 갈라져 시린 겨울바람이 든다.
'저 나무가 나와 같구나'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흐르는 눈물을 훔치지 못해 카키색 점퍼에 눈물이 뚝뚝 떨어져 번졌다. 아버님의 말씀을 들으며 두 손은 창백하고 차가운 그의 왼손을 말없이 계속 주물렀다. 몰래 흘리는 눈물이 남편의 손에 떨어져 내가 우는 걸 알아차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했다. 한때 통통했던 그의 손도 이젠 뼈가 드러나 겨울나무처럼 앙상했다.
다행히 오늘은 응급실 대기가 길지 않았다. 들어가서 30분 정도 기다리니 응급실 내 진료실로 호출되었다. 젊은 남자 의사 선생님이 우리를 맞이했다.
"환자가 구토와 두통이 너무 심해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요"
"어제 찍으신 mri를 보니 11월과 비교해서 암이 자라지 않았습니다"
(전날 MRI를 찍기 위해 병원을 왔었다. MRI센터는 주말, 밤, 새벽 상관없이 24시간 가동된다. MRI를 찍고 일주일 후 진료가 예약된 상태였지만 남편 상태가 너무 나빠 일주일까지 기다리지 못해 응급실에 온 터였다)
"정말요? 근데 너무 힘들어하는 건 왜 그럴까요. 밥도 전혀 먹질 못하고 두통이 점점 심해지는데 펜타닐 패치에 마이폴(마약성 진통제)까지 먹는데도 통증이 잡히질 않아요. 혹시 뇌부종이나 뇌출혈이 있을까요?"
남편은 두 번째 수술 때도 두통이 너무 심해서 응급실에 왔었고 뇌출혈이 발견되어 수술을 진행한 전적이 있어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CT를 찍어보잔 말과 함께 진료 대기실로 나왔다.
검사를 기다리며 잠시 숨을 골랐다. 아침에 간단한 식사를 한 것 외에 먹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남편은 금식이 유지되어야 하니먹을 수가 없다.
'나라도 기운을 내야 해. 내가 정신 차려야 해'
그에게 밥을 먹고 오겠다 말하곤 응급실 밖을 나왔다.
병원에서는 도착함과 동시에 뛰어다닌다. 내가 뛰어야 시간이 절약되고 그래야지 남편이 기다리는 시간이 줄어든다. 응급실 바로 옆 편의점을 향해 정신없이 뛰어가는데 그 주위를 맴돌고 있는 시어머님과 마주쳤다. 병원에는 보호자 한 명만 들어갈 수 있어 응급실 안까지 들어올 수 없는 시어머님이 어디 앉아 있지도 못하시고 응급실 옆을 서성이고 계셨다.
"어머님 저 밥 먹으러 나왔어요"
"식당 가서 먹지 왜 편의점엘 왔어"
"아니에요. 빨리 먹고 들어가야 해요. 식당 갈 시간 없어요"
대충 배고픔만 해결하고 남편에게 돌아가야 했다.
편의점에 들어가 참치김밥 한 줄을 골랐다. 국물 같은 건 고르지도 않고 김밥만 서둘러 먹고 들어갈 요량이었다. 어머님은 그런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라면에 물을 부어 가져다주셨다. 김밥을 입에 밀어 넣고 우걱우걱 씹고 있는 나를 보며 천천히 먹어라, 천천히 먹어라 하셨다. 어머님 말씀에 먹는 속도가 천천히 느려졌다.
"아버지 말이 맞는 거.. 충분히 알지.. 근데 아픈 아들놈이 저렇게 누워있는데 아픈 애를 일으켜서 밖을 걷게 하고 억지로 먹이고, 나는 못하겠다.. 나는 마음이 약해서 못하겠어"
어머님 말씀에 입에 꾸역꾸역 욱여넣은 김밥을 물고 눈물이 왈칵 흘렀다.
입은 다물지도 못하고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우는, 참을래야 참을 수가 없는 이상한 표정이 되었다.
"아이고.. 울지 마라.. 앞으로 울 일이 많은데 벌써부터 울면 어떡하니.."
어머님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휴지 몇 장을 꺼내주시다가 내가 눈물을 그칠 기미가 안보이자 근처에 있는 테이블 냅킨을 가져다 탁자 위에 올려놓으셨다. 가져다 주신 휴지로 눈물 콧물을 닦았다.
"어머님 제 마음이 그래요. 제가 오빠를 자꾸 이겨먹어서 억지로 데리고 다니고 먹을 거도 강제로 먹여야 하는데 그게 안 돼요. 아버님 말씀 다 맞는 거 아는데 제가 마음이 약해서 그걸 못하겠어요"
환자가 나으려면 보호자가 독해져야 한다. 어떻게든 병을 이겨내게 해야 하는데 몸져누운 그가 안타까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가 너무 바보 같고 싫었다.
남편이 아프고 어머님 앞에서 단 한 번도 운 적이 없는데 어머님 또한 내게 우는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다. 생때같은 아들이 자식 둘을 두고 창창한 나이에 병을 얻어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나도 자식 가진 어미로 내 슬픔보다 어머님의 슬픔이 더 크실 거라고 생각했기에 어머님 앞에서 감히 울 수 없었다. 그런 며느리가 김밥을 입에 물고 울고 있으니 적잖이 당황하신 기색이셨다.
"어머님 그래도 저 우는 거 오빠한테 한 번도 들킨 적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없어요"
"으휴 저 둔한 것.. 지 마누라 우는 것도 못 알아차리고.."
속이 타들어 갈지언정 어머님은 며느리 앞에서 끝까지 울지 않으셨다. 눈 오는 날은 나가셔서 한없이 눈 맞는 것을 좋아하시는 소녀 같은 우리 어머님, 참 강인하셔서 존경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