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의 계획은 없다!
쉬는 날이다.
늘어지게 늦잠을 잤다.
아홉 시, 열 시, 고등학생 아들이 등교하고 대학생 딸이 나갈 때까지도 이불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잠이 쏟아진 것인지 잠이 쏟아지기를 바란 것인지, 잠과 잠 사이를 헤매다가 눈을 떴다.
뭔가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었다.
오늘 잡힌 약속도 없고 시간 맞춰 해결해야 할 일도 없었다.
뭔가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내려고 어디를 간다거나 무엇인가를 하려는 마음도 일지 않았다.
맘먹고 푹 쉬기로 했다.
바쁘게 바쁘게 지낸다고 해서 좋은 것만은 아니다.
느리게 느리게 지내는 게 좋을 때도 있다.
성과를 내기 위해 부지런히 일하는 게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아무 일 없이 가만히 있는 게 더 좋을 때도 있다.
오늘은 느리게 지내고 가만히 있는 편을 택했다.
라디오 채널을 맞춰 대학 동기가 진행하는 클래식 음악 코너를 배경으로 삼았다.
브람스의 음악이 흘렀다.
삼 일 전에 갈아놓은 커피가 있었다.
뜨거운 물을 부으니 아직 생생하다고 소리치듯이 거품이 포로로 일어난다.
잘 익은 대봉감 하나 집어 들고 책상에 앉았다.
대봉의 달콤함과 콜럼비아 커피의 씁쓸함이 교묘히 어우러진다.
간밤에 읽다 덮은 수필집을 펼쳐 들고 소리 없이 읽어 내려간다.
휴일 오전의 호사다.
점심때가 지나가길래 아내에게 밖에 나갈까 물어봤는데 집밥을 먹자고 한다.
돈도 아낄 겸, 냉장고에 있는 반찬도 해결할 겸, 건강도 챙길 겸.
부산스럽게 식사준비를 하였는데 먹는 데는 고작 10분 남짓이었다.
어젯밤에 깔끔했던 싱크대가 접시며 그릇으로 다시 한가득이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애니팡 게임도 몇 판 해 보고 쿠팡을 열어 이것저것 들여다보고 당근마켓에 올라온 물건들은 뭐가 있나 두리번거렸다.
사지도 않을 거면서.
사지 않을 거니까 이러는 거다.
살 거면 진작에 결재하고 나왔을 거다.
겨울 햇살이 오후로 넘어가면서 아내는 외출할 준비를 한다.
이른 저녁식사 모임이 있다.
5시쯤에 만나기로 했다는데 끝나고 집에 오면 9시가 넘을 것 같다.
여자들의 모임이 그렇다.
식사 모임이라지만 네댓 시간은 족히 간다고 봐야 한다.
아무리 쉬는 날이지만 집에만 가만히 있으면 몸이 축날 것 같으니 나도 바깥공기를 맡고 와야겠다.
가방에 책 한 권, 전자책 리더기 하나 집어넣고 머리에는 커다란 헤드폰을 씌우고 집을 나섰다.
어디로 갈지는 정하지 않았다.
동네 한 바퀴 돌고 오기에는 양이 안 찼다.
서점을 갈까?
도서관을 갈까?
카페를 갈까?
도무지 나 혼자서 갈만한 마땅한 데가 없었다.
이럴 때는 그냥 지하철을 타는 게 상책이다.
내가 고민하지 않아도 지하철이 알아서 나를 데려가 준다.
월요일 점심시간과 퇴근시간 사이여서 그런지 지하철 안이 한산했다.
덕분에 자리 하나 잡고 책을 펼쳤다.
괜찮은 풍경이다.
정자, 수내, 서현... 복정... 수서... 대모산... 강남구청역.
지하철 출입문이 열리고 닫히려는 순간 뛰쳐나왔다.
더 이상 가봤자 거기서 거기다.
이제 돌아가자.
집 나온 지 3시간이 지났다.
꽤 멀리까지 갔다 왔다.
그 사이에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집에 와서 아내와 바통 터치를 했다.
아내도 나가고 아들도 공부하러 간다고 나가고 딸아이는 일찌감치 나갔다.
다시 혼자의 시간이다.
장석주의 에세이를 읽고 최영미의 시를 읽고 가벼운 철학책 한 권을 읽었다.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은 하루였지만 꽤 많은 일을 처리하였다.
영화 보러 나갔던 딸아이가 돌아오고 공부하러 나갔던 아들이 돌아왔다.
사람들 만나러 나간 아내는 아홉 시에는 돌아올 것 같다더니 10시가 넘은 지금까지 안 돌아온다.
여자들의 모임이 그렇지 뭐.
카페 닫을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를 거다.
괜찮다.
시간 붙들어두지 않으려고 했던 날이니까.쉬는 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