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에 대한 전쟁이 빨리 그치기를 바라며...
같은 물건을 바라보더라도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300페이지짜리 책을 본다고 했을 때 책 겉 페이지를 정면에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널찍한 직사각형 모양이 보인다.
책의 옆면을 보는 사람은 좁은 직사각형이 보인다.
책장을 펼쳐서 보는 사람은 책 안에 적힌 글들이 보인다.
모두가 책을 보지만 자기가 보는 각도에 따라 책이 달리 보인다.
우리가 맞닥뜨리는 모든 일들이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달리 보이고 내가 바라보는 시선의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인다.
누구에게나 어떤 일을 해석하는 자기만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그가 처한 상황과 그가 바라보는 시선의 각도이다.
빌딩 꼭대기에 있는 사람을 볼 때, 빌딩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높이 올라가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하지만 하늘 위에 떠 있는 사람들은 저 아래에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어느 것이 맞다고 할 수 없다.
둘 다 맞다.
해석하기 나름이라고 하지만 그 해석이라는 것도 자신이 처한 상황과 자신이 바라보는 시선의 각도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옛날이 살기 좋았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옛날에는 정말 살기 힘들었다고 한다.
옛날이라는 한 단어를 가지고 둘이 다른 해석을 하는 것은 ‘옛날’이라는 그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 두 사람이 다른 상황과 다른 시선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사람이 말하는 ‘옛날’과 저 사람이 말하는 ‘옛날’이 같은 말인 것 같은데 전혀 다른 말이 되고 만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언어학자이자 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라고 했다.
내가 표현하는 말에는 나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의 상황과 나의 시각이 투영되어서 나의 말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나의 가치관이 되고 나의 세계관이 된다.
그렇지만 나의 말, 나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정답이라는 말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게 맞는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이게 맞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선생님들은 공부를 잘하면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근데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더 나쁜 사람이 되기도 한다.
공부를 못했으면 덜 나쁜 사람이 되었을 텐데 그놈의 공부가 사람의 인생을 망쳐놓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인생에 정답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었다.
학력이라고는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인 사람이라도 세계적인 기업을 만들기도 한다.
반면에 최고의 대학을 졸업한 사람도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인 사람 밑에 들어가서 일을 하기도 한다.
어떤 게 더 나은 삶이고 어떤 게 더 위대한 삶인지 섣불리 이야기할 수가 없다.
시간이 지나 봐야 안다.
시간이 지나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나의 상황과 나의 시각이 제일이라고 고집해서는 안 된다.
세상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걸 늘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지중해 기행>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몇 사람의 미국인이 이집트 농부와 내기를 걸었다.
“당신이 저 거대한 피라미드를 6분 안에 올라갔다 내려오면 반 파운드를 주겠소.” 여위고 굶주린 농부는 죽기 살기로 피라미드에 기어올랐다.
바위들 사이로 뛰어다녔다.
이따금 보였다 안 보였다 하더니 마침내 꼭대기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곤두박질치듯이 돌진해서 내려왔다.
돌아온 농부는 헉헉대다가 그들의 발치에 털썩 쓰러졌다.
하지만 6분이 지났다.
미국인들이 이겼다.
그들은 헛웃음을 남긴 뒤 떠나버렸고 농부는 통곡하였다.
미국인들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러나 다른 시각으로 보면 그들은 정말 나쁜 사람이다.
이집트 농부에게 몹쓸 짓을 했다.
내 환경과 내 시각으로 괜찮아 보이더라도 그게 다른 사람에게도 괜찮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생존의 문제가 나에게 오락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