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느껴봤을 텐데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해서 들어보면 전혀 다른 사람 같다.
과연 내 목소리가 맞나 싶어서 옆사람에게 물어보면 내 목소리가 맞다고 한다.
이상하다.
나만 모르는 비밀을 주변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내가 나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나는 잘 모르고 오히려 친구들이 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다.
내 성격이 무던한 줄 알았는데 친구들은 까칠하다고 한다.
음식을 가리지 않고 아무것이나 잘 먹는다고 했는데 친구들은 아니라고 하며 내 젓가락이 자주 가는 음식이 있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다.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이 있다.
당연하다.
지금껏 나는 내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으니까.
매일 거울을 보니까 내 모습을 본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은 나를 뒤집어 놓은 내 앞면뿐이다.
뒷모습은 보이지도 않는다.
가슴 깊숙이 눌러놓은 마음은 더욱더 볼 수가 없다.
화가들이 자신의 모습을 그리려 했던 마음이 조금 이해가 된다.
렘브란트나 고흐 같은 인물은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로 알려졌는데 나이의 변화에 따라서 자화상의 분위기가 다르다.
같은 인물일지라도 시대와 환경이 바뀌면 사람도 달라진다는 사실을 그림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넉넉한 생활을 할 때는 생활에 여유가 있어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도 넉넉하다.
하지만 상황이 변하여 빠듯한 삶을 살아갈 때면 다른 사람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그것이 얼굴에 표현된다.
사람 자체가 변한 것이 아니다.
내 안에는 이런 모습도 있고 저런 모습도 있는데 상황에 따라 이 모습이 표출되기도 하고 저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나’라는 인물은 평면 위에 그려진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4차원의 시공간을 드나들면서 살아가고 있다.
딱히 한두 가지 단어로 나를 규정할 수가 없다.
그러니 나도 나를 잘 모른다는 말이 맞는 말이다.
자기계발서들을 보면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에 관한 내용들을 많이 다룬다.
다양한 관점에서 자기계발 방법들을 이야기하지만 공통되는 내용이 있다.
자신을 계발하려면 반드시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책에서나 다 나를 찾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라고 한다.
여행을 떠나보면 진정한 자기 자신을 보게 된다고 한다.
일리가 있다.
여행 중에는 예상치 못했던 여러 사건과 사고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런 상황들에 처하면 비로소 내 속에 숨어 있던 ‘나’가 하나씩 튀어나온다.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구나!’ 하면서 감탄도 하지만 깜짝 놀라기도 한다.
못된 사람에게도 좋은 면이 있고, 착하고 순한 사람에게도 악하고 독한 면이 있다.
평상시에 볼 수 없었던 내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라고 노래했던 하덕규가 생각난다.
내 속에 내가 너무나 많아서 다른 사람의 자리가 없었다.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서 ‘내가 이런 사람이오!’라며 명함을 내밀 때가 있다.
손바닥 절반 크기도 안 되는 그 작은 종이에 뭐라고 써야 할까?
출신 지역, 졸업한 학교, 자격증, 직장 이름과 사회적인 경험들을 모아놓았다고 해서 나를 제대로 표현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잊을만하면 명함을 새로 찍는다.
우리 옛 어른들은 큰 변화가 있어서 깨달음을 얻을 때마다 자기 이름을 하나씩 더해갔다는데 그것도 참 현명한 방법으로 보인다.
세종대왕의 이름이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휘는 도(祹), 자는 원정(元正)인데 아명은 막동(莫同, 막내)이었다고 한다.
오랜 시간 동안 집안에서는 막동이로 불렸다는 사실이 나를 웃겼다.
세종도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을 것이다.
긴 인생 여행을 하면서 하나씩 알게 된 것이다.
오늘도 나는 하루의 여행을 떠났다.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 하덕규의 노래입니다.
https://youtu.be/cZ0WdcX0v6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