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7월 어느 날, 이지선 씨는 대학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귀가하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에 화상을 입었다.
그 후로 생사를 넘나드는 수술을 여러 차례 받았다.
곱고 아리땁던 모습은 모두 잃어버리고 그 대신 일그러진 모습을 받았다.
하지만 삶을 놓아버리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쳤다.
숱한 화상치료와 수술을 받으면서 자신의 아픔을 그리고 희망을 글로 적어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을 썼다.
많은 감동을 준 책이다.
그 후로도 그녀는 수십 번의 수술을 받았다.
10년의 시간이 지난 후 그동안 견뎌온 시간들을 모아 <다시, 새롭게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을 썼다.
그 책이 나온 지 또 10년이 지났다.
그런데 그 책의 한 구절에 “사는 것은 죽는 것만큼 힘들었습니다.”라는 문장을 적어 넣었다.
엄청 큰 충격을 받았다.
책을 읽으면서 ‘아! 이 사람은 이렇게 힘든 일을 잘 견뎠구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가끔 사는 게 힘들까 죽는 게 힘들까 저울질해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번쯤은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오늘도 아침 뉴스에는 이제 편해지고 싶다며 마지막 인사를 남긴 사람의 사연이 실렸다.
그 사람이 생사의 기로에서 저울질하던 그 고민의 무게와 깊이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많이.
그 ‘많이’라는 말도 대충 어느 정도인지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잴 수 없어서 그럴 것이다.
앞이 캄캄했을 것이다.
계속 이렇게 살다가는 그 끝이 너무나 비참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마감하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아마 그가 자기 스스로 자기 맘대로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결정이 그것이었는지 모른다.
세상이 그렇다.
누구나 자기만의 권리가 있다고 하지만 그 권리를 사용하기가 쉽지 않다.
이것저것 다 뺏긴다.
유일하게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사느냐 죽느냐를 결정하는 권리일지도 모른다.
셰익스피어도 그런 고민을 했을 것이다.
비록 햄릿의 입을 통해 표현했지만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중얼거리지 않았나?
궁궐에서 잘 먹고 잘 지냈던 햄릿 왕자도 그런 고민을 하는 걸 보니 했다.
이 고민은 사람을 피해 가지 않는 것 같다.
그 고민을 할 때, 잘 선택해야 한다.
인생은 한 번 선택한 것을 되돌릴 수가 없다.
지울 수도 없다.
갔던 길 다시 돌아가는 순환열차를 탄 게 아니라 종점까지만 가는 편도 열차를 탄 것이다.
그것도 딱 한 번이다.
사는 쪽을 택했다고 해서 장밋빛 찬란한 정원이 보이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바로는 그렇다.
죽는 쪽을 택했다고 해서 편안해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이건 내가 경험해보지 못해서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럴 것 같다.
그래서 죽는 쪽을 선택한 사람들이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는 것 아닐까?
미안(未安)한 것은 편안하지 않다는 말이다.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노예 출신이었다.
어려서 부모와 헤어졌다.
다리를 다쳐서 평생 장애인으로 지냈다.
돈도 별로 없었다.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추방도 당했다.
사느냐 죽느냐를 여러 번 저울질했을 것이다.
그때마다 그는 매번 사는 쪽을 택했다.
왜냐하면 인생을 연극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신이 나에게 이 연극의 배역을 맡겨주셨는데 나 스스로 연극을 끝맺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나에게 맡겨진 배역을 끝까지 완수하면 된다는 거다.
비극이 되면 싫지 않냐고?
그렇지 않다.
비극이 되면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할 수 있어서 좋은 연극이 된다.
희극이 되면 너무 우습지 않냐고?
그것도 그렇지 않다.
내 인생 조금 망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잠시라도 웃음을 줄 수 있다면 그것도 멋진 인생 아니겠는가?
사는 게 힘들다.
죽는 것만큼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