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살이가 쉽지 않았던 시절을 떠올리며

by 박은석


스무 살 때 청춘의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인구 천만 명의 도시 서울은 너무 크고 복잡했다.

어디를 가나 집들이 많았고 사람도 많았다.

아침 버스는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지하철도 마찬가지였다.

어디를 가더라도 누구를 만나더라도 서울 사람인 척해야 무시당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줄 알았다.

말을 하더라도 서울 사람처럼 말하려고 했고 옷을 입어도 서울 사람처럼 입으려고 했다.

그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원판이 제주도인데 서울판이라고 우겨서 될 게 아니었다.

얼굴 때깔부터 달랐다.

선배들은 나에게 재수했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하니까 그럼 군대 다녀왔냐고 물었다.

재수 다음에는 삼수를 물어봐야 하는데 아무도 나에게 삼수생이냐고 묻지 않았다.

내 얼굴이 삼수생이라고 하기에는 더 나이가 들어 보였던 것 같다.

선배들의 눈에 그렇게 비쳤으니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그렇게 비쳤을 것이다.




월화수목금토일요일 중에서 제일 싫은 날이 토요일이었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토요일에 학교 수업이 있었는데 대학교는 토요일이 공휴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서울에 아는 사람이라곤 학교 친구들이 전부인데 학교에 가도 그들이 보이지 않았다.

지방에서 온 친구들은 금요일 오후가 되면 고속버스를 타고 열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서울에 집이 있는 친구들은 그냥 집에 있고.

나는 갈 데가 없었다.

주말마다 비행기 타고 제주도에 갈 수는 없었으니까.

차라리 일요일에는 교회라도 갈 수 있었다.

물론 교회라고 해서 내가 아는 사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정해진 교회도 없었으니까 한동안은 이름이라도 들어본 교회들을 순례하다시피 찾아갔었다.

교회라고 해서 다 친근했던 것은 아니다.

고향의 교회는 100여 명 남짓 모이는 작은 교회였는데 서울의 교회들은 너무 크고 으리으리해서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주눅이 들곤 했다.




내가 데모라도 많이 했으면 주말이 무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에게도 청춘의 울분이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교회 선배들을 통해서 배운 민중가요의 가락이 마음속에서 파도를 쳐대고 있었다.

서울역으로 광화문으로 뛰어나가 목이 터져라 외쳐대고 싶은 말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뭔지 모를 힘이 내 발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저녁이 되면 학교 앞 주점에서 목청을 높이며 노래를 불러대던 친구들이 부러웠다.

2차, 3차로 이어지는 그들의 끈끈한 우정에 장단을 맞추지 못했다.

신입생환영회 때는 막걸리 한 병을 원샷하면서 나의 건재함을 자랑했었다.

내 핏줄이 그랬다.

대대로 내려오는 술에 강한 집안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자리가 껄끄러웠다.

무슨 모범생이라도 되는 듯이 저녁 9시 이전에는 누나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얹혀살았던 곳이다.

그렇게 스무 살의 나는 어디를 가나 주변인처럼 뱅뱅 겉돌기만 했다.




서울 생활이 안정되어갈 즈음에 고등학교 친구들을 수소문했다.

다행히 누가 어느 학교 무슨 학과에 다니는지 알고 있었다.

학교 신문을 주고받으면서 하숙집 전화번호도 알았고 어느 기숙사에 묵고 있는지도 알았다.

몇 월 며칠 몇 시에 MT를 가자고 했다.

학교는 다르지만 다들 한 번은 다녀왔을 만한 곳 대성리로 장소를 잡았다.

몇 달 만에 만나는 고향 친구들이었다.

눈치 보지 않고 맘껏 제주도 사투리를 쓸 수 있었다.

나만 힘들게 보냈는 줄 알았는데 친구들도 나 못지않게 서울살이에 고생을 하고 있었다.

군대 갔다왔냐는 질문도 나만 홀로 받은 게 아니었다.

돌 바람 여자가 많다는 제주도여서 그런지 바닷바람에 얼굴이 많이 상해서 그런지 우리의 얼굴은 남들보다 더 많은 인생을 산 듯 보였던 것 같다.

밤새도록 잘 견디자고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였다.

그 덕분인지 지금까지 잘 견디고 있다.

벌써 30년 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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