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것에는 다 소망이 있다

by 박은석

런던의 케이미술관에는 프레드릭 왓츠의 <소망>이라는 그림이 걸려있다. 둥그런 지구 위에 한 여인이 앉아서 비파를 연주하는 그림이다. 그런데 이 여인의 눈은 수건으로 가려져 있다. 아마 장님이어서 그런가 보다.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 악기를 연주한다니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악기뿐만 아니라 앞을 보지 못하면 세상 모든 일이 다 힘들 것이다. 그래서 장님에게 소원을 물어보면 아마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 같다. 헬렌 켈러가 쓴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글을 읽다 보면 두 눈 뜨고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깊이 느낄 수 있다. 장님인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이도 있다. 앞을 볼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는 심정이 묻어 있는 이야기이다.


<소망>이라는 그림의 여인은 앞을 보지 못하는 것 외에 또 하나의 어려움을 안고 있다. 그것은 그녀가 연주하는 비파의 줄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원래는 일곱 줄의 비파였는데 그 중의 여섯 줄이 끊어졌고 지금은 달랑 한 줄만 간신히 붙어 있다. 여인은 그 한 줄로 조심스럽게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그림을 보는 관람객들의 마음이 더욱 조마조마해진다. 마치 우리 자신의 심정을 콕 집어서 그려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여인이 지구 위에 앉아 있다는 것은 지구 위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 같다. 일곱 가닥의 비파 줄 중에서 여섯 가닥이 하나씩 툭 툭 끊어져나갈 때 여인은 얼마나 당황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한 줄을 붙들고 끝까지 연주를 하는 것이다.


살아가다 보면 그토록 의지하고 기대했던 인생의 줄들이 하나씩 끊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모파상이 쓴 <여자의 일생>에는 아버지가 떠나고, 남편이 떠나고, 아들이 떠날 때의 여인의 마음을 구구절절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의지했던 사람이라는 줄이 그렇게 끊어지는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건강의 줄도 끊어지고, 경제력의 줄도 끊어지고, 권세와 명예의 줄도 끊어진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망을 포기하고 절망을 끌어안는다. 그런데 절망을 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왜냐하면 아직 줄 하나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줄이 다 끊어지기 전까지는 어쨌거나 연주를 할 수 있다. 아니 끝까지 연주를 해야 한다. 비록 일곱 줄이 어우러진 멋진 화음을 만들어내지는 못하지만 단음만의 또렷한 음은 낼 수가 있다.


청중은 그 음악이 일곱 줄 화음의 곡인지 아니면 한 줄 단음의 곡인지 전혀 모른다. 그저 연주자가 연주하는 대로 들을 뿐이다. 원래 일곱 줄짜리 곡일지라도 한 줄로 연주하면 그 한 줄만의 독특한 음악이 되기도 한다. 여섯 줄이 끊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연주할 수 없다는 절망이 아니라, 그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가지고 그 한 줄 만으로라도 연주해보면 아주 새로운 음악을 탄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소망의 결과들로 차고 넘친다. 음식만 봐도 그렇다. 먹을 것이 없어서 버리려고 했던 뼈다귀를 푹 고아서 사골국을 만들어냈다. 애매하게 남은 잡다한 식자재를 모았더니 비빔밥이 만들어졌고, 냄비에 지글지글 쪘더니 부대찌개가 탄생했다. 포기하여 버릴 수도 있었는데 소망을 가졌더니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 버릴 것은 하나도 없다.

세상 모든 것에는 다 소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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