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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Dec 29. 2022

어느 곳에서 누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오늘은 또 한 번의 끔찍한 사고가 일어난 날이다.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뉴스들 사이에서 ‘속보’라고 표시된 뉴스가 있었다.

이게 뭔가 싶었다.

제목만으로도 심상치 않은 사고가 난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독 사건 사고가 많이 일어난 한 해였다.

연말이 되면서 시끄러운 소리들이 더욱 많아졌다.

뉴스 기사를 클릭하기가 두려웠다.

제목만 보고도 대충 가늠할 수 있었다.

애써 다른 쪽으로 관심을 가지려고 했다.

그러나 나의 마음에서는 자꾸 그 처참한 사고의 현장이 떠올랐다.

내 얼굴의 눈은 돌릴 수 있어도 내 마음의 눈을 돌릴 수 없었다.

내 얼굴의 귀는 막을 수 있어도 마음의 귀는 막을 수가 없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을 겪게 된 사람들이 또 생겨났다.

분명 남의 일인데 남의 일 같지 않다.

나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일인데 마치 옆에서 일어난 일처럼 여겨진다.




내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지내고 있을 때, 누군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내가 음악을 들으며 흥얼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는 살려달라고 부르짖고 있었다.

내가 사무실 의자에 앉아 기지개를 켜고 있을 때,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터널 밖으로 뛰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들을 보지 못했고 그들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예 그들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같은 시간에 같은 하늘 아래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들을 알지 못했고 그들의 소리를 듣지 못했고 그들의 아픔에 함께 하지도 못했다.

나는 나만의 세계 속에 스스로 숨어 들어앉아서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있었다.

상황이 다 종료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가 되어서야 슬그머니 일어나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의 소리와 그들의 부르짖음과 그들의 모습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닌 척했다.




한밤중에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집을 읽다가 <엄숙한 시간(Ernste Stunde)>에서 눈이 멈췄다.

그냥 책장을 넘길 수가 없었다.

100년 전에 떠나간 사람인데 그의 소리가 아직도 세상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나의 마음에는 분명 울려 퍼졌다.


“지금 세계의 어느 곳에서 누가 울고 있다.

이유도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은

나를 울고 있다.


지금 밤의 어느 곳에서 누가 웃고 있다.

이유도 없이 웃고 있는 사람은

나를 비웃고 있다.


지금 세계의 어느 곳에서 누가 걷고 있다.

이유도 없이 걷고 있는 사람은

나에게 오고 있다.


지금 세계의 어느 곳에서 누가 죽어 간다.

이유도 없이 죽어 가는 사람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릴케가 오늘 나의 마음에 들어왔다가 나간 것이 분명하다.

아니면 이렇게 나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고 있을 리가 없다.

100년 전의 사람 릴케에게 나의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동안 수많은 사건 사고를 대할 때 흥미로운 뉴스거리처럼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희생되고 다쳤는데도 몇 사람이 희생되고 몇 사람이 다쳤는지 그 숫자에만 눈길이 갔었다.

희생자들에게 보험은 적용되는지, 보상은 받을 수 있는지, 그 금액은 얼마인지에만 관심을 가졌었다.

그들의 부르짖는 모습은 잘 찍힌 사진 영상이라며 그 작품성을 논하기도 했다.

관계 당국의 대처가 신속하게 이뤄지는지 책임자들의 태도가 어떤지를 눈살을 찌푸리면서 지켜보곤 했다.

나는 철저히 방관자로서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런 나를 릴케가 시로써 흠씬 두드리며 꾸짖었다.

어느 곳에서 누가 울고 있으면 그 울음을 나의 울음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냐고 묻고 있었다.

어느 곳에서 누가 걷고 있다면 그 걸음은 나에게로 오는 걸음이라고 여길 수 없냐고 묻고 있었다.

어느 곳에서 누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도 그를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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