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이 너무 약한 사람을 만났다

by 박은석


자존감이 너무 약한 사람을 만났다.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사람이었다.

첫 만남이니까 밝은 얼굴로, 활기차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인사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달리 고개만 잠깐 숙이고 지나가려고 했다.

그의 이름을 부르고 악수를 청했다.

어색하게 내 손을 잡기는 했지만 손아귀에 힘은 없었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쳐야 제대로 인사하는 것인데 그는 내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그랬다.

조용한 목소리로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들라고 했다.

사람 앞에 고개를 숙일 필요가 뭐가 있냐고 했다.

나도 사람이고 내 앞에 있는 존재도 사람인데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라고 했다.

그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는 틈틈이 나에게 와서 내가 자기에게 말 걸어주기를 바랐다.

애써 밝은 체하는 모습을 보였다.

많이 노력하는 티가 났다.

아직은 어설펐다.




내가 며칠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에게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

기껏 자존감을 세워보려고 했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듯한 목소리였다.

내가 그를 다시 만났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는 자신이 정한 길로 이미 떠나버렸다.

전화를 하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긴 침묵 후에 전화벨이 울렸다.

떠나갈 때 가더라도 인사는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인사’라는 단어를 내 입에서 꺼낸 게 묘했다.

‘인사(人事)’!

말뜻대로 해석하면 ‘사람의 일’인데, 그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안녕!’이라고 말하고 헤어지는 것이다.

어쨌거나 마지막으로 한 번 만나기로 약속했다.

이미 자신의 길을 정해 놓은 만남이었기에 줄다리기할 말은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내가 묻고 그가 대답하고, 지금까지 왜 그렇게 주눅이 들었는지 내가 묻고 그가 대답하는 식이었다.




그에게도 할 말이 참 많았나 보다.

살아오면서 억울하게 당했던 일, 잘하고 싶었는데 잘 안되어서 속상했던 일, 자신을 해코지하는 사람에게 맞서 싸우지 못했던 일.

처음에는 별것 아닌 것 같았는데 그런 일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자신의 고민을 들어줄 사람이 옆에 없었다.

고등학생 때는 좋은 분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다.

내 친구였다.

아마 그때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따뜻했던 날들이었던 것 같다.

스무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고 했다.

만약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스무 살 이후의 고민을 이야기할 상대가 있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에게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하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하루종일 울리지 않는 휴대폰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의외로 참 많이 있다.




나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세상을 살아갈 이유가 있다고 한다.

바꿔서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 나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면 세상을 살아가기가 힘들 것이다.

외로움은 칼이나 총보다 더 무서운 힘으로 우리에게 폭압을 행사한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내가 말을 한 시간보다 그가 말을 한 시간이 더 길었다.

악수를 하고 이제 안녕이라고 인사를 했는데도 그는 가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비 내리는 하늘 아래서 그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주었다.

그리고 이제 진짜로 안녕이라고 했다.

어쨌거나 견뎌내라고 했다.

언젠가는 극복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그에게 행운을 빌었다.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안쓰러웠다.

고개를 숙이고 등은 굽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보다 더 약해 보였다.

속으로 ‘잘 살아야 한다!’라고 외쳐주었다.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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