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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까야 Jan 18. 2023

우울증을 뛰어넘어보자

진료받으러 갈 때마다 점점 왜소해지는 내 모습을 보고 의사선생님은 제발 운동 좀 하라고 조언 아닌 강권을 하셨다.


하긴 병원 진료 받으러 가는 날도 몸살이 날 만큼 내겐 힘든 외출이었다. 공황발작 때문에 외출을 못했고, 외출을 못하니 더 안움직이게 되고, 안움직이니 근육은 더 빠지고 그래서 외출은 더 어려워지고...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컬러배쓰 효과인건가...병원 진료후 힘겹게 집으로 돌아와 신발을 벗었다.  그때 처음 눈에 들어왔다. 신발장 구석에 놓여있던 빨강색과 파란색의  줄넘기.


* 컬러 배스 효과(color bath effect) :  “색을 입힌다”라는 의미로 한 가지 색깔에 집중하면 해당 색을 가진 사물들이 눈에 띄는 현상을 말한다.



남북한 단합의 의미도 아닌 빨강, 파랑컬러의 줄넘기들이 신발장 구석에 걸려있었다. 언제 이걸 샀더라..,?  

먼지가 좀 앉아있긴 했지만 초등학생들 사이에선 유명하던 줄넘기였다.


평소 외부의 작은 소리에도  발작으로 괴로워하던 내게 그 날은 모험과도 같은 날이었다. 마침 아파트 단지 내에 유달리 조용한 시간대였다. 아이들은 전부 학교에 있고 직장인들은 직장에 있을 그런 시간대 말이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운동 관련 글을 연재해서 1위도 했던 나였는데, 운동에 대해선 트레이너만큼 자신있던 나였는데 줄넘기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솔직히 고백하건데 "줄넘기 따위"라고 생각했었다.


어찌되었든 내 상황은 이리 괴로우나 저리 괴로우나 하루를 힘겹게 버티는건 매 한가지였다.  언제까지 약만 먹고 좀비처럼 누워서 세상을 등지고 살것인가?


귀마개를 단단히 하고 (외부소리에 발작이나 신체화 증상이 나타나면 큰일이므로), 줄넘기를 들고 기싯거리며 집앞 놀이터 옆 공터로 갔다.


그 순간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마치 체육대회 릴레이 마지막 주자로 뛸 때처럼.


2022년 2월 나는 처음으로  병원 진료 이외에  자발적으로 밖으로 나왔다. 그것도 비장하게 줄넘기를 들고서.


10개, 50개, 70개... 100개도 못 채우고 우웩...


초등학생들이나 하는 만만한  줄넘기일 줄 알았는데 이리 힘들 줄이야!  구토가 쏠려 입 안에 침이  순식간에 고였다. 눈물, 콧물은 왜 나는지... 몸 안에 수분이란 수분은 다 쥐어 짜내는 느낌이었다.  몇 번 뛰었다고 종아리에 쥐까지 났다.



죽을것 같이 힘드니 체면이고 뭐고 벤치에 드러누워버렸다,..


놀이터 벤치에 거의 드러눕다시피 헉헉댔다.

마침 하교를 한 듯한  초등학생 어린이 한 명이 줄넘기를 들고 내 근처로 왔다. 긴 포니테일에 볼이 통통하고 핑크색 츄리닝 세트를 입은 귀여운 어린이였다.


토끼같이 귀여운 그 여아는 나를 의식한듯 현란한 줄넘기 동작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아마 아파트 윗층에서 나를  내려다 본게 아닐까.  저 아래 놀이터에서  줄넘기로 헉헉 대고 있 안타까운 한 어른을  보고선  한 수 보여주겠다며 공터로 온 느낌이었다.


"통통통~ "  탄력있는 관절에서 나오는 스프링 같은 뜀박질,  오랫동안 뛰어도 신나는 밝은 표정.


"보아라..,어른아!  이것이 줄넘기라는 것이다!"


마치 내게 몸짓으로 이렇게 가르치는 것 같았다.


다소 부끄러웠지만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하며 나는 나를 위로 했다.


벤치에 었던 몸을 무겁게 다시 일으키며 나도 초등학생의 도전장을 받아들였다. (어쩌면...  초등학생은 나같은 사람은 신경따위도 안썼을지도 모른다... 나 혼자만의 대결일지도 모르겠지만.)


 날 난 꽤 오랜 시간 동안 줄넘기를 했다. 뛰다 멈추고, 헉헉대고, 또 뛰다 멈추고 헉헉 대고..


하루 줄넘기 1000개.

 날부터 내가 목표한 줄넘기 개수다. 시간은 상관 없었다. 구토가 쏠리면 토하면 되고,  힘들면 쉬었다가 다시 하면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리 하나 저리 하나 괴로운건 매 한 가지였으니까.


줄넘기의  줄을 한 번, 한 번  힘겹게 뛰어 넘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산티아고의 순례길을 걸어야만 힘든 고행의 길은 아니라고.  지금 이 자리에서 한 번의 힘겨운 뜀박질을 한다는 것, 바로 주저 앉아버리고 싶은 마음을 눌러가며 " 번 더"를 외치며 뛰는 것. 그것이 내겐 수행 그 자체였다.


당장 내일 어떻게 살지, 내년에 어떻게 살아갈지, 병을 이기고 내가 다시 학교로 복귀해서 교단에 설 수 있을지...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보다 지금 이 순간을 뛰어넘는게 제일 중요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몇 천원짜리의 가볍고 얇은 줄넘기 하나가 나와  공황장애와의 경계선을 만들어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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