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도 처음엔 짐승처럼 맨발로 다녔을 것이다.
지금도 아프리카나 남태평양 섬에 가면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발다닥은 굳은 살이 박혀 아주 딱딱해져서 뾰족한 돌멩이나 유리조작도 상처를 입히지 못할 정도로
단단하다.
남태평양 피지섬에선 원주민들의 축제중에 '파이어 웍스(fire walks)라 하여 돌을 벌겋게 달구어 놓고
그 위를 맨발로 걸어가는 놀이가 있다. 지금은 관광객들에게 보여주는 하나의 이벤트인데
발바닥에 굳은 살이 박힌 그들이 아니면 엄두도 못낼 일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언제부터 신발을 신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반 서민들이 신발을 신기 시작한 것은 짚신이다.
볏짚으로 꼬아서 묶은 것으로 수명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부잣집에서는 가죽신을 신었다고 들었다.
나무를 파서 신고 다닌 나막신도 있었다. 나막신은 짚신에 비해 무거웠다. 비올 때는 짚신 대신에 게다를 끌고 다녔다.
고무신이 나온 것은 일제때였다고 한다. 짚신을 신다가 고무신으로 바뀌니 가볍고 편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나무 판대기에 끈을 단 게다도 일제때 들어온 것이다.
나도 어릴 때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고무신이 다 떨어지면 5일마다 서는 반성장에 가서 새신을 사야했다.
새 신을 사면 헌신은 엿장수가 오면 엿과 바꿔 먹었다. 베신(운동화)이 있었지만 고무신에 비해 비쌌으므로 설이나 추석이 돼야 얻어 신을 수 있었다. 당시애는 부산에 고무신 공장이 많았다. 태화고무의 말표, 동양고무의 기차표, 삼화고무 공장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당시의 공장들이 다 없어지고 말았다.
예전에는 먹고살기에 급급했으므로 등산이나 트래킹이란 용어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산에 간다면 으례 지게를 지고 땔감나무하러 가는 줄로 알았다. 그것도 짚신이나 고무신을 신고서 말이다.
짚신이나 고무신은 비탈길을 가면 발에 땀이 나지 않아도 미끄러웠다.
나무를 한 짐 가득해 지고 비탈길을 내려오면 다리가 후들거렸다. 바(지게) 작대기를 잡고 조심조심 내려오지 않으면 비탈길에 미끄러져 나뭇짐과 함께 지꾸러지기 일쑤였다. 바 작대기가 지금의 등산용 스틱역할을 해 주었다.
지난 토요일에 친구 두 명과 함께 금정산 등산을 갔다.
약속장소인 호포역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는데 등산화 신발 밑창이 떨어져서 헐떡거리는 게 아닌가.
도로 집으로 돌아가 운동화라도 바꿔 신고 나가려니 약속시간에 늦을 것 같아서 임시로 신발 끈을 풀어서 밑바닥을 둘러 싸맸다. 왼쪽 신발이 앞쪽만 남겨 놓고 거의 다 분해되었고 오른쪽 신발은 가운데 부분만 떨어져 있었다. 밑창을 감아서 싸맸더니 일단 걷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호포에서 친구와 만나 금정산으로 올랐다. 경사가 그리 급하지 않아 두 사람 뒷쪽에서 따라 올라갔으나 신발밑창이 헐떡거려 하산할 때까지 애를 먹었다. 몇년전 마라톤대회에서도 오래된 런닝화를 신고 뛰는데 도중에 신발밑창이 완전 분해 되어 한 손엔 신발밑창을 들고 결승점까지 뛰었던 적도 있었다. 신발은 오래 신지않고 그냥 두면 고무풀이 저절로 떨어진다고 한다. 먹거리와 마찬가지로 유효기간이 있는 모양이다.
우리나라가 세계1위의 조선국과 한 때 세계7위의 해운국이 되는 데는 초창기 해기사들의 공이 컸다.
대미항로에 스팀 레시프로기관인 남해호가 정기로 뛰던 시절이었다. 2차대전때 전쟁물자를 실어나르기 위해 설계된 전시표준형인 시마비타입이었다. 중고선을 구입했던 회사가 부산에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화물을 싣고 출항하여 태평양을 횡단하는 데 대양에서 저기압을 만나 배의 갑판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워낙 큰 파도에 맞아서 철판의 강도가 견디지 못한 것이다.
선장이하 전 선원이 나와서 와이어로 금이 간 부분을 동여 매어 목적항까지 겨우 끌고 갔다고 한다. 도중에 혹시 배가 두 동강이 나서 침몰할 까봐 무전으로 본사와 대리점에 미리 전보를 쳐놨다고 한다. 배가 무사히 미국 항구에 입항하자 파도와 싸워 죽을 고생을 한 선원들도 이젠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지방신문에는 최고의 씨맨쉽(seamanship)을 보여준 쾌거라고 대서특필됐다고 한다. 그러나 선장은 한국에 돌아오자 마자 해고 됐다고 한다. 배를 수습하지 않고 그대로 침몰시켰더라면 보험회사로부터 막대한 보험금을 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