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이며 과자며 케이크며 맛있는 음식을 잔뜩 맛 본 아들은 요새 통 밥 먹기를 싫어한다. 가장 배고픈 아침에 그나마 가장 잘 먹는데 이때를 노려 고기를 많이 먹인다. 오늘 아침도 아기새처럼 입을 벌리며 밥을 잘 받아먹는데 이런! 밥그릇이 떨어져 버렸다. 잼 바른 빵처럼 알맞게 뒤집어진 밥그릇은 말끔하게 음식을 뱉어냈다. 아, 너무 아깝다. 그리고 나는 또 새로운 밥을 준비해야 한다. 그게 더 싫다.
언니가 어제 해다 준 장조림에 달걀을 먹여야겠다. 차가운 건 싫어하니까 전자레인지의 힘을 빌리자. 달걀을 생각해 낸 순간 그래도 기운이 났다. 달걀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식탁으로 돌아오는데 오늘 펼쳐질 하루를 응원이라도 하듯 폭죽이 펑펑 터진다. 아니, 달걀이 펑펑 터진다. 전자레인지가 난리가 났겠군. 가보니 노른자가 덕지덕지 붙은 전자레인지가 나를 반긴다. 그래, 이참에 청소라도 하자. 아직 아침의 활기참이 남아있는 나는 생각했다. 터진 달걀들 속에 살아남은 달걀 하나가 보인다. 저 달걀도 터지기 전에 옮겨야겠다고 생각하며 숟가락을 움직이는 순간. 마지막 폭죽이 터졌다. 펑!
뜨거운 노른자가 얼굴이 다닥다닥 붙었다. 너무 뜨겁다. 이건 화상이다. 화장실로 달려가 찬물로 세수를 반복하는데 내 비명소리에 놀란 아들이 울어댄다. 눈치는 있구나. 아들아, 상황이 좋지 않단다. 그래도 아기 얼굴이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다. 다행히 나도 크게 다치지 않았다. 이 정도에서 끝난 게 어디람.
겨울은 육아에 암흑기다. 날이 추워지니 아기와 딱히 갈 곳이 없다. 그래도 오늘은 용기를 내서 나가봐야지. 오랜만에 공원에 가자. 작년에 입던 두꺼운 패딩 우주복을 꺼낸다. 아들이 온몸으로 말한다. 입기 싫다고. 이제 걷기 시작한 아들은 우주복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하지만 춥잖아. 감기에 걸린다고. 아직은 내가 너를 이긴다. 꾸역꾸역 아들에게 우주복을 입혀 길을 나선다. 가는 길에 고양이도 보고 수족관에 물고기도 본다. 아들아, 재밌지? 역시 나오길 잘했지?
공원에 도착하자마자 유모차에서 내려달라고 난리다. 유모차에서 내린 아들은 어느새 우주복은 잊고 신나서 걸어간다. 씩씩하게 걷는다. 여기저기 걷는다. 그러다가 아주 장렬히 넘어졌다. 불편한 우주복 때문이었다. 우는 아들을 일으켜 세우니 코가 깨졌다. 흙 범벅이 된 코는 아직 성탄절은 멀었는데 루돌프처럼 빨겠다. 상처에서 스멀스멀 피가 올라왔다. 정말 미안해. 아들의 울음소리 너머로 원망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안 입는다고 했잖아요오오오오오'. 이 우주복은 정말 안녕이다. 안녕!
짧은 하루를 되돌아보니 오늘은 도무지 되는 일이 없는 날이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는 아기를 과자로 달래고 달래 집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더 큰일이 생기기 전에 안전한 그곳으로. 집이 가까워진다. 안심이 된다. 하지만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지. 불행은 늘 안심하는 순간 찾아오니까. 신호도 잘 보고 유모차도 단단히 잡는다. 핸드폰도 보지 않는다. 저 문을 지나 횡단보도 하나만 더 건너면 돼. 이제 유모차 끌고 무거운 유리문을 여는 것쯤은 익숙하지라고 생각한 순간.
아차차. 너무 아프다. 그 무거운 유리문에 발이 끼었다. 프러포즈라도 하듯 다리 하나가 저절로 구부러졌다. 눈물이 찔끔 난다. 사람들이 쳐다본다. 일어나야 한다. 얼른 집으로 가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일어섰다. 절뚝절뚝 거리며 걸었다. 너무 아프다. 하필 스타킹을 신어서 발을 살펴볼 수도 없었다. 아기는 어느새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아기를 침대에 눕히고 나니 발에 통증이 더 세차게 느껴졌다. 피가 맺힌 스타킹을 벗으니 퉁퉁 부은 발이 보인다. 병원에 가야 하나. 아기까지 데리고 나설 엄두가 나지 않는데. 도무지 되는 일이 없다. 시계를 본다. 아직 12시가 채 되지 않았다. 오늘 하루 남은 불운을 헤아려본다.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지새운 어젯밤이었다. 가지지 못한 것과 가지고 싶은 것 사이를 헤매던 밤. 오늘의 불운 앞에 돈 걱정, 건강 걱정, 지금 걱정, 미래 걱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 이러한 사소한 불행은 죽비처럼 나를 내려친다. 괜찮다고. 이 정도가 어디냐고. 사소한 불행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진다. 지난 투정은 다 배부른 소리였다고. 엎어진 밥그릇이야 지금은 생각도 안 나고, 전자레인지는 덕분에 깨끗해졌다. 아기 코에 난 상처는 그 정도가 어디냐고 위안 삼고 내 퉁퉁 부은 발도 시간이 지나면 멀쩡해질 것이다. 오늘 저녁은 정말 잠이 잘 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