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우리는 평상시보다 쉽게 낯선 이를 신뢰한다. 이 신뢰는 가끔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지만 대부분 새로운 경험으로 우리를 이끈다. 일상에서도 타인을 조금 더 신뢰한다면 재밌는 일들이 많이 생기지 않을까.
그 언젠가 베네치아에서 있던 일이다. 여행자 신분의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칠흑 같은 어둠과 검은 물결 그리고 바페레토뿐이었다. 바페레토는 물의 도시라고 불리는 베네치아의 수상버스다. 밤하늘과 검은 바다는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이 안 가고 이국적인 풍경은 설렘보다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어둠 속에 흐르는 물소리는 또 왜 이리 큰지. 가뜩이나 추워 움츠러든 어깨는 한층 더 움츠러들고 무거운 짐가방은 땅바닥을 파고들 것만 같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우리에게 남은 것은 전진뿐. 낯선 언어와 더 낯선 노선표를 뚫어지게 살펴보며 적당한 바페레토 정류장에 내리기는 했는데 숙소까지 찾아가는 것이 문제였다. 지금은 구글 지도를 켜고 찾아가면 되지만 스마트폰이 없던 그 시절, 우리가 기댈 곳은 미리 인쇄해 둔 지도뿐이었다. 하지만 미로 같기로 악명이 높은 베네치아에서 어둠과 안개까지 더해졌으니 진지하게 오늘 밤 안에 찾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늦은 밤, 인적 없는 좁은 골목길을 무거운 짐가방과 함께 기약 없이 헤매자니 도저히 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골목길을 다 비슷하게 생겼고 지나가는 사람은 없고 어둠과 안개가 동시에 우리를 에워싸는 이 상황에서 당장 숙소보다 우리의 안전이 걱정되었다. 그때, 갑자기 한 남자가 우리를 불러 세웠다. 어디를 찾고 있느냐고.
무서웠다. 낯선 장소에서 달빛 아래 모르는 남자라니. 심지어 여기는 외국이라고. 하지만 무거운 짐가방을 들고 헤매느라 지친 우리는 도망갈 수도 없었다. 아니, 아무리 무서워도 인적 하나 없는 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다. 마지막 동아줄처럼 이 사람을 믿어야만 한다. 우리는 구겨질 대로 구겨진 지도를 건넸다. 그 남자는 자기를 따라오라며 짐가방을 번쩍 들고 앞장섰다. 따라가도 되나 망설였지만 이미 내 짐은 저 남자 손에 있고 우리에게 다른 방도도 없었다.
성큼성큼 걷는 그를 열심히 따라 걷다 보니 경계심은 풀어지고 우리와 그의 거리도 꽤 가까워졌다. 조금의 여유가 생기자 그는 상투적으로 물었다. where are you from?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하자 갑자기 그가 한국어로 대답했다! 이탈리아에서 처음 만난 낯선 남자 입에서 나오는 한국어라니. 그 어색한 발음의 한국어는 우리를 무장해제시키기 충분했다. 그는 한국에서 꽤 긴 시간 유학생활을 했다고 했다. 어학당에서 한국어도 꽤나 배웠다고.
한국어를 하는 이탈리아인이 길까지 찾아주다니. 지칠 대로 지친 불쌍한 영혼을 위해 하늘이 보내준 천사가 아닐까. 그는 낯선 곳에서 한껏 움츠려 든 우리를 다정한 고국의 말로 위로해주었다. 그 천사는 구불구불한 골목과 몇 개의 다리를 건너 우리를 숙소까지 데려다준 후 I love korea! 를 외치며 다음날 베네치아를 구경시켜주는 은혜까지 베풀었다.
여행자는 때때로 약자의 입장에 놓인다. 낯선 곳에서 우리는 재고 따질 여유도 없이무작정 다른 사람의 친절에 기대곤 한다. 나도 여행지에서 몇 번쯤 뒤통수를 맞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보다 재미난 일이 훨씬 많았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믿음은 그 어떤 멋진 풍경보다 진한 추억으로 남았다.
일상으로 돌아온 우리는 언제나 그랬냐는 듯이 혼자서도 잘 살아간다.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낯선 것들을 경계해야 한다. 길을 묻는 낯선 이는 도를 아십니까를 외치고 모르는 번호는 대출을 권하는시대니까.
하지만 가끔은 이 모든 것을 제쳐두고 믿고 싶은 대로 믿어보면 어떨까. 그냥!이라는 단순한 이유와 함께 말이다.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가끔은 내 발등을 찍어 상처를 내기도 하지만 가끔은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문이되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사실 불신이라는 조기교육을 받은 우리는 아무리 믿어도 '적당히' 밖에 믿을 수 없다. 그러니 걱정은 내려놓고 가끔은 그냥 믿어보자.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선량한 동지들을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