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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할 수 있을 때

by pahadi


나는 잠이 많았다. 이리저리 공상하다 스르륵 잠드는 순간이 좋았고,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잠자는 순간이 좋았고, 개운하게 리셋하며 깨어나는 순간이 좋았다. 그렇다. 나는 잠을 ‘사랑’했다. 다음 생이 있다면 다람쥐로 태어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겨울잠을 잘 수 있으니까.

어른이 되어서도 ‘잠’ 사랑은 멈추지 않았다. 나의 취침 시간은 여전히 9시였다. 노는 것보다 자는 게 좋았다. 잠을 충분히 못 자서 피곤할까 늘 넉넉히 자 두었다. 이렇게 잠으로 시간을 낭비해도 되나 싶을 때도 잠으로 걱정을 달랬다. 아빠는 “너는 인생의 반을 잠으로 보낼 거냐!!” 호통을 치셨지만 그래도 나쁠 것 없다고 생각했다. 나머지 반을 더 열심히 살면 되는 거 아닌가. 이번 생은 이렇게 태어났나 보다. 이왕 이렇게 태어난 김에 편하게, 행복하게 자야지.

항상 누워있는 내게 남편이 물었다.

“아니, 왜 맨날 누워 있는 거야?”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반문했다.

“아니, 누워있을 수 있는데 왜 안 눕는 거야?”

나는 대책 없이 해맑았다. 행복한 수면 생활을 언제까지나 영위할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낙관론이 서서히 깨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체.

그렇다. 나는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엄마가 되었다.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그 어떤 각오도 없이 시작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데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엄마가 될 수 있었겠지.

뱃속에 강낭콩만 한 아기를 확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무럭무럭 배가 나왔다. 점점 커져가는 아기는 나의 장기를 짓눌렀고 앉으나 서나, 물구나무를 서나 불편하고 숨이 턱턱 막혔다. 사랑해 마지않던 자는 시간도 곤욕이 되었다. 배가 무거워 누우면 허리가 아팠고, 방광이 눌려 시도 때도 없이 화장실에 가느라 잘 수가 없었다.

‘아기만 낳으면 그동안 못 잔 거 실컷 자야지’라고 이를 갈았으나 이 얼마나 얼토당토 하지 않은 생각이었는지. 엄마라는 이름이 그리 가벼운 게 아니라는 걸 나는 그때까지도 몰랐다.

“으아아아아앙~”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드디어 나에게 사회적 이름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바로 땡땡이 엄마. 병원에서도 조리원에서도 땡땡이 엄마라고 불렸다. 낯설었다. 내 이름은 석자가 따로 있는데. 이 엄청난 복선을 지나고 나니 알겠다. 내 이름 석자를 지워야 엄마가 될 수 있다는 걸.

사이렌처럼 울어대는 작고 귀여운 생명체에게 밤낮이란 없었다. 낯선 세상에서 믿을 건 오직 엄마뿐이라는 듯 작은 손이 필사적으로 나를 움켜잡았다. 우리는 24시간 한 몸이 되었다. 아이는 내 품에서 젖병을 물고, 내 품에서 자고, 내 품에서 놀았다. 나의 24시간을 고스란히 아기에게 받쳤다. 편히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당연히 싸는 것도 사치였다. 혹시나 짬이 나도 이번엔 내가 아기에게서 떨어질 수가 없었다. 연약한 생명체가 어떻게 될까 봐 한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커피를 연거푸 들이부으며, 시뻘게진 눈으로 눈물을 삼키며 생각한다.

‘잘 수 있을 때 자두길 진짜 잘했다. 그나마 덜 억울하네.’

내가 이렇게 치밀한 사람이었다니 미처 몰랐다. 앞으로도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고, 놀 수 있을 때 열심히 놀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사랑도 줄 수 있을 때 마음껏, 흠뻑 주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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