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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두그린 Oct 27. 2020

추상, 현상들의 본질(Nature)

예술경영 season 1_14

1. 피카소의 추상, <화가와 뜨개질하는 모델>


“당신들은 보고 있어도 보고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보지만 말고 생각하라! 표면적인 것 배후에 숨어 있는 놀라운 속성을 찾으라! 눈이 아니고 마음으로 보라!”


큐비즘의 새로운 시대를 연 화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말이다.


1907년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로 20세기 미술사의 가장 혁명적인 사건의 중심에 있던 그는 1927년 연인인 마리 테레즈 발터(Marie Thérèse Walter)가 뜨개질하는 모습을 그린<화가와 뜨개질하는 모델(Painter and Nitting Model)>을 내 놓았다.


파블로 피카소, <화가와 뜨개질하는 모델(Painter and Nitting Model)>, 1927

이 그림은 좌측에 뜨개질 하는 여인과 우측에 그녀를 그리는 피카소 자신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그림 속 피카소의 캔버스에는 여인의 모습이 아니라 직선과 곡선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 형상은 밑그림이 아닌 그녀의 진정한 초상화이다.


우리들의 예상대로 피카소는 결코 단순한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왜 이 그림을 그렸을까? 해석의 실마리는 ‘추상’에 있다. 흔히 추상이라 하면 어려운 개념이나 20세기 이후 재현을 벗어나 회화의 순수성을 극대화한 추상회화와 연결시켜 그 자체로 어렵고 난해한 의미로 규정한다. 피카소는 이러한 추상을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였다. ‘추상’은 사물의 배후에 숨어있는 어떤 속성을 뜻한다.


그는 <화가와 뜨개질하는 모델>에서 모델의 형상보다 그녀가 머물고 있는 공간에 주목했다.

그녀가 뜨개질을 하면서 앞뒤로 움직이고 실을 엮어내어 문양을 확인하고 자신의 몸에 대어보고, 실타래를 만지다 바닥에 떨어진 실타래를 줍기 위해 몸을 굽히는 일련의 뜨개질하는 모든 과정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 oil on canvas, 243.9x233.7cm, 1907, ©MOMA 소장


피카소가 생각하기에 뜨개질하는 여인의 실체는 정지된 초상이 아니라, 뜨개질 하는 모습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는 ‘추상’이 대상의 대표적인 특징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덜 띄는 한 두 개의 특성만을 표현하여 전체를 드러내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특성을 찾는 것이 바로 추상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리하여 입체주의의 대가 피카소는 특징적인 몇 가지 표현들로 새롭고 다의적인 의미들을 가져다주는 그림들을 그릴 수 있었다. 분명한 것은 피카소가 결코 재현에 서툴러서 그렇게 그린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회화에 있어서 ‘추상’의 의미와 방법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추상’을 어렵고 난해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추상이 우리들의 일상 밖 형이상학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는 착각, 혹은 편견 때문이다.



2. 유리창 안과 밖의 사과


만약 하나의 사과를 던져주고 학생들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학생들은 모두 사과의 정물화를 그릴 것이다. 조금 섬세한 학생이라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의 정물 사과처럼 구도와 색상, 빛의 변화를 표현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사과를 가지고 추상화를 표현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거의 대부분 붉고 푸른 점들을 찍어 놓을 것이다. 몇몇 추상에 별 관심이 없는 학생들은 애플사의 로고를 그릴 수도 있다.


폴 세잔, <사과>, oil on canvas, 58,5x48.5cm, 1889-1890


만약 사과의 추상을 학생들이 아닌 선생에게 요청한다면 어떻게 될까? 분명 선생도 당황해하며 학생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그 자신의 생각이 아닌 교육하는 과정에서 습득한 특정 유형의 추상을 표현할지도 모른다.


분명 우리는 ‘추상’이 복잡한 체계에서 하나만 제외하고 모든 변수를 제거함으로써 사물의 핵심적인 본질을 드러나게 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실제 그것을 표현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는다. 우리는 ‘추상’의 개념을 습득했지만 체득하지 못했다. ‘추상’은 모든 상상력의 출발점이 된다. 추상화는 이러한 상상력의 과정을 담아내는 것이다.


사과로 돌아가 보자사과의 추상은 사과의 형상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과의 촉감과 향기, 소리와 사과를 집어든 사람의 행동까지 사과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추상화의 과정에 속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사과의 추상을 시각성에서만 찾으려고 하며, 이 총체적인 접근을 아예 생각하지 못한다. 바로 ‘추상’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뜻한다.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 1952, © Rene Magritte


추상은 단순화이다. 그러나 이 단순화는 시각적 단순화가 아니라 사물의 핵심, 곧 본질적인 근원을 드러내는 태도이자 과정이다. 그런데 이 단순화를 이해함에 있어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추상을 현실과 결부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살면서 모든 것을 단순화하고 추상화하고 있다. 수학과 과학이 그러하고 예술 또한 이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추상은 우리들의 삶 속 모든 곳에 존재하고 있다. 순수 추상화의 길을 연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는 이 추상과 현실의 관계를 자신의 책 『점·선·면』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어떤 현상이든지 두 가지 방식으로 체험될 수 있는데, 유리창을 통해서 거리를 바라보면 거리의 소리는 감축되어 들리고 거리의 움직임들은 판토마임처럼 보인다. 

거리 자체는 투명하지만 견고하고 단단한 유리창을 통해 격리되어 있는, 즉 피안(彼岸)에서 고동치고 있는 본질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막상 문이 열리면 우리는 폐쇄된 상태로부터 벗어나, 이 본질 속에 혼입되어 그 속에서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자신의 모든 감각을 가지고 이 고동을 체험하게 된다.”

바실리 칸딘스키, ‘무제(최초의 추상 수채화)’, 종이에 연필·수채·잉크, 49.6×64.8cm, 1910 © Wassily Kandinsky

그는 예술작품이 유리창 안의 본질로 드러나 보이지만, 분명 문을 열고 나와 모든 감각이 살아 숨 쉬는 추상의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현실의 복잡한 상태들의 순수한 본질, 즉 사물의 내재적 의미들을 온전히 알기 위해 그는 점·선·면이 작동하는 외적, 내적 세계의 완전한 울림이 있는 ‘추상’ 정신에서 예술의 의미를 찾고자 하였다.



3. 추상, 상상력의 새로운 발로(發露)


그렇다면 어떻게 현실 속에서 추상에 도달 할 수 있을까?

그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대상을 잘 관찰하는 것이다. 현실을 제대로 지각하는 것이 추상에 이르는 첫 번째 과제이다. 즉, 구체적인 실재로부터 시작하여 실재의 흔적들을 지워버리는 과정이 바로 추상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현상의 가장 핵심적인 실재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야 모든 것을 지워내고 생략하고 단순화하여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기본적인 표시, 즉 그 대상의 가치가 남아있을 수 있다.


추상화는 대상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할 때 자연스럽게 표현된다. 단순, 즉 ‘심플함’은 대상의 가장 근원적인 가치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 가치는 현실이 그러하듯 여러 갈래의 접근을 허용한다. 즉, 어떤 대상이든 수많은 추상이 가능하고 또한 이 추상은 바로 상상력의 새로운 발로(發露)가 된다. 

그렇기에 사과의 추상을 교육함에 있어 어떠한 예시적 형상도 보여주면 안 되는 것이다. 피카소와 칸딘스키, 몬드리안과 이우환을 보여주면 결코 안 된다.


사람들의 삶으로부터 사과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상상을 할 수 있게 언어로 문제를 던져줘야 한다. 예술은 기본적으로 언어화된 사유의 번역이라 할 수 있다. 언어란 그 안에 내재해 있는 의미들을 전달하고 전달받음의 커뮤니케이션 즉, ‘대화’로 이루어진다.


이는 곧 선생이 사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추상화 한 사과의 새로운 ‘말들’을 들어주어야 함을 뜻한다. 예술행위는 각자의 삶으로부터 고매한 추상화 과정을 거친 ‘예술적 언어’이다.

물론 그 언어가 학생의 주관적인 환상 안에서만 가치를 지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환상의 가치를 객관화하여 타인에게 설명함으로써 추상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 또한 예술의 여정에 속한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이나 <게르니카(Guernica)>(1937)처럼 현상들의 본질, 즉 현실의 가장 현실적인 모습을 담아낸 작품이 바로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추상’이다.


창녀와 나치의 게르니카 폭격을 그린 피카소의 2대 걸작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원에 대해 그 어떤 표현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말을 건낸다.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Guernica>, 캔버스에 유채, 349.3 x 776.6 cm, 1937


이와 같이 추상의 본질은 바로 이 현실의 모습인 것이다. 피카소가 가장 추상적인 것이야말로 현실성의 정점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였듯이, 추상화는 단지 어렵고 난해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가장 순수한,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을 의미 있는 상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예술의 표면 너머에 있는, 그러나 결코 삶을 벗어나지 않는 생생한 의미들을 눈이 아닌 마음으로 느끼고 표현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추상’이다. 자! 이제 우리들의 사과를 추상화 할 차례이다.


글 | 빨간넥타이 두두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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