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프라이는 참 간단해 보이는 음식이지만, 내가 만들 때와 엄마가 만들어주실 때 맛의 차이가 극명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은근한 내공이 필요한 요리 같기도 하다. 과정이 간결할수록 실력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법이랄까.
엄마의 조리법에 자주 등장하는 소금양의 "대충"은 참으로 맛있게 되는데 그에 반해 아직 "대충"의 감을 찾지 못한 나는 소금을 너무 적게 넣어 맛이 비리거나, 너무 많이 넣어 짜서 대체제(소스나 밥)를 찾게 된다. 엄마의 계란프라이는 약간 짭조름한 게 맨입에 먹어도 밥과 함께 먹어도 딱인데 말이다.
프라이팬 위에서 예술적 감각으로 저은 엄마의 계란프라이는 노른자와 흰자의 절묘한 배합으로 색과 맛의 조화도 좋지만, 스크램블보다 촉촉함을 유지하면서도 그에 못지않은 말캉폭신한 식감으로 그 자리에서 날 녹여버린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끈한 김에 은은한 고소함까지 감돌아 먹을 때마다 나는 기껍다. (고소함의 정체는 다름 아닌 참기름. 엄마는 참기름을 두르고 계란프라이를 만드신다.)
나는 아직도 이리저리 튀는 뜨거운 기름이 겁나서, 계란프라이 하나 할 때도 손끝까지 소매를 끌어내린 뒤 몸을 뒤로 뺀 채 팔을 쭉 뻗어 뒤집곤 하는데, 엄마의 손에서 뜨거운 기름으로 거뭇거뭇해진 세월의 흔적이 보일 때면 엄마의 '대충'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라, 수많은 시도와 반복 끝에 다다른 경지구나 싶어진다. 몸에 익은 '감'이 계량, 시간, 온도 같은 것들로 수치화되지 않았을 뿐.
시간이 만든 두터운 지층은 비단 음식뿐만이 아니다. 매일 쓰는 소금 용기 하나에도 엄마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몇 해 전 엄마 어깨 수술로 간단한 요리 몇 가지를 만들어 본 적 있다. 엄마는 늘 작은 밥공기 모양의 요거트 용기를 씻어 소금을 담아 쓰셨는데, 평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그 소금 통을 들었을 때 느꼈다. 대수롭지 않게 보였던 그 소금 통은 손이 쏙 들어가는 크기, 바닥까지 불편함 없이 소금을 집을 수 있는 깊이, 손목에 무리가 가지 않는 가벼운 무게감, 담긴 재료가 악력으로 흐트러지지 않을 단단한 재질, 기름때가 앉으면 애써 박박 문지를 필요 없이 교체하기 좋은 편의성마저 갖춘 것이 아닌가.
체계적으로 보이지 않을 뿐 그냥인 게 없었다.
초등학생 입맛인 내가 반찬을 쓱 한번 보고 “안 먹을래요” 하면, 엄마는 슬며시 일어나 계란프라이를 해주신다.
1인용치고는 푸짐한 달걀 3~4알 양의 계란프라이를.
계란프라이와 혼연일체가 될 정도로 딱 맞는 크기의 동그란 그릇에 담아.
그릇 가장자리에 여유 공간이 없어 손으로 들기 뜨거울 것 같은데도, 가득 찬 느낌이 좋으신지, 넉넉하게 채워주고 싶으신지, 더 큰 그릇이 있는데도 늘 그리 담아주신다.
밥상 위에 엄마의 마법 같은 ‘대충’의 요리법으로 만들어진 계란프라이가 살포시 올라올 때면 ‘우리 딸 사랑해’라 말해주시는 것 같아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발표 날이 지나도록 울리지 않는 전화, 글자를 몇 번이나 고쳐가며 조심히 보낸 문자, 다정히 건넨 인사에 돌아오지 않는 답으로 마음이 허해지는 날이면 괜스레 엄마표 계란프라이가 먹고 싶어진다.
반찬 투정을 할 나이도 아닌 다 큰딸이 식사를 거를까 봐 염려되어 몸을 일으켜 해 주시던 계란프라이가.
내 입에 들어가는 것 하나에서도 비롯되는 그 관심에 마음이 풍요로워졌던 엄마표 계란프라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