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는 떫은맛이 절로 느껴질 것 같은 설핏 푸른색을 띨 때 마트에 진열되었다가 영글고 싱그러운 노란빛을 발할 때 집에 안착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탄탄했던 바나나는 차츰 부드러워지고, 노란 옷에 작은 고동색 점들이 하나둘 고개를 내밀다 제각기 다른 크기의 원으로 꽃을 틔우듯 만개하며 제 색을 뒤덮는다.
나는 이 일련의 과정이 마치 우리의 유년 시절부터 검버섯이 피는 노년에 이르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인생의 굴곡을 여러 번 넘으며 삶의 지혜가 깊어지는 노인처럼, 바나나의 단맛은, 수분을 머금었던 단단한 노란색 껍질을 살포시 건드리기만 해도 폭 들어갈 만큼 고동색 꽃이 곳곳에 피어날 때 정점을 찍는다.
노란 바나나를 사용해도 되지만 엄마는 늘 고당도의 바나나 우유를 우리에게 주기 위해 바나나 껍질에 고동색 점박이 꽃이 필 때까지 기다렸다가 바나나 우유를 만들어주셨다.
요리법은 아주 간단하다. 잘 익은 바나나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우유와 함께 믹서기로 갈아주면 끝.
바쁜 아침 간단하게 식사하기엔 이보다 좋은 음식이 또 있을까.
몇 해 전 언니는 이유도 모른 채 어지러움과 두통으로 오랜 회사 생활을 뒤로하고 잠시 쉬었던 적이 있다.
병원에 가도 이유를 알지 못했고 여러 병원에 다녔지만, 호전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언니는 극심한 어지러움으로 앉아있는 것조차 힘들어했기에, 엄마는 언니에게 늘 바나나 우유를 갈아주셨다.
근기가 있어 배도 든든한데 빠르게 먹을 수 있었고, 먹고 바로 누워도 소화하는데 부담이 적어 당시 언니에겐 더할 나위 없는 음식이었다.
그렇게 두 달, 언니는 쾌차하게 되었다.
바나나 우유에 큰 효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뛰어난 의술의 의사가 낫게 한 것도 아니었다.
오랜 사회생활에 지친 언니에게 휴식도 필요했겠지만, 언니의 병을 낫게 한 건, 그 시간 그녀를 돌본 엄마의 정성과 사랑이었다.
나이 들며 주변인들이 한둘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는 것을 본다.
언제 이들이 이렇게 자라 어른이 되었나 싶어 신기하면서도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 걸 옆에서 보면 육아라는 것이 참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저 쪼꼬미가 언제 자라 말도 트고 스스로 생활할 수 있게 될지 여타 육아서와 통계를 통해 알면서도, 자신의 일상을 온전히 가로챈 깜찍한 귀요미를 엄청나게 사랑하면서도, 인간의 기본 욕구마저 참고 인내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를 미워하는 감정도 든다고 한다.
그런 양가감정 속에서도 엄마들은 얼마나 대단한지
제 삶을 양분 삼아 자라는 아이 곁에서 밤낮 아이의 불편을 덜어주고 잘 자라날 수 있도록 헌신한다.
나는 앞날이 막연하게 느껴질 때면 조급증에 안절부절못하며 하루는 우울했다, 하루는 희망에 부풀었다, 또 하루는 좌절하며 다 놓아버리고 울고 싶어져 나 하나도 감당하기 힘들고, 나조차도 널뛰는 나를 진득하게 사랑하기 어려운데, 엄마는 어찌 이리도 긴 시간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봐 주신 걸까.
아직도 다 자란 우리를 염려하시고 뭐 하나라도 더 챙겨주시려고 하는 엄마를 볼 때면 여전히 엄마의 육아는 끝난 것 같지 않다.
왠지 엄마는 우리가 노년에 접어들어 얼굴에 검버섯이 피어도 우리를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걱정하실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