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숙정 Jan 13. 2022

바보들의 행진

삼청동 거리에서



서른세 번째 이야기








우리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사이였다. 공연리뷰를 인터넷 매체에 연재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고 그 사람들 가운데 그 사람도 있었다. 그땐 항상 나를 '선배'라고 불렀다. 사진기자였던 그를 일로 몇 번을 만났을 뿐 따로 얼굴을 볼 사이는 아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는 그때 연애가 진행 중이었고 나는 결혼(?)을 한 사람이었다. 우리의 인연은 일 년에 한두 번 스쳐 지나가는 정도였다. 


그와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것은 '싱글'을 주제로 글을 써볼까 싶어 인터뷰할 사람을 찾으며였다. 그는 싱글이었고 기자였으니 들을 이야기가 많겠다 싶었다. 그는 인터뷰에 흔쾌히 응했다. 별로 할 이야기가 없는데 괜찮겠냐고 시작한 이야기는 정말 별 것이 없었다. 그는 일 외에는 혼자 즐기는 여가생활도 없었다. 혼자서 영화관 가는 것도 즐기지 않았다. 일이 항상 바빠서 쉴 때는 그냥 쉰다는 아주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그날의 인터뷰는 참 싱겁게 끝이 났다. 





맥없이 끝난 그날의 만남 이후로 또 몇 달이 지났다. 나는 이혼 직후 몸이 많이 아팠다. 빈혈이 심했고 생리통이 극심해졌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119에 실려가는 날도 있었다. 세 번째로 119에 실려 응급실을 간 그날은 의사가 내게 화를 냈다. 

"죽고 싶어서 그래요? 응급수혈을 받아야 하니까 입원을 해요."

그렇게 입원을 해서 수혈을 받았다. 자궁선근종으로 자궁이 2배로 커져 있다는 거였다. 수술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진단과 함께 퇴원을 했다. 


출산을 해야 하는 나이가 아니니 자궁적출은 상관이 없지만 자궁이 커져있어서 힘든 수술일 거라는 의사의 말에 겁이 났고 수술 후 후유증도 무서웠다. 전문병원을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지만 수술이 급하다는데 어느 병원을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왜 그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아마 기자여서 전문병원을 알아봐 줄 수 있을 거란 단순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는 내 전화를 받자마자 병원을 알아보고 바로 연결을 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다. 


그는 병원에 데려가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하혈 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나를 병원에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수술을 위해 입원을 하는 날도 보호자가 되었고 매일 병원을 오고 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상황이었다. 결혼도 안 한 남자가 큰 관계도 없는 여자의 자궁적출 수술과 입원을 돌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수술을 위해 수혈을 하고 밤새 고열과 반복되는 얼음찜질로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을 가족도 아닌 그 사람은 내내 지켜봤다. 





나는 퇴원과 함께 빠르게 회복했다. 적기에 좋은 의사에게 수술을 받아 후유증도 없이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플 때 옆에 있어준 사람이 제일 고맙다고들 한다. 나 역시 그랬다. 옆에 있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이 아픈 내게 측은지심이 발동을 했을 거라 생각했다. 내 가장 바닥의 모습을 보여줘서였을까. 그가 편했다. 그때는 아프니까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도 몰랐는데 만나 이야기를 해보니 이야기도 잘 통했다. 죽을 만큼 아팠던 나를 살려준 은인이었지만 우리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를 다시 만난 건 두 번째 책을 의뢰받고 나서였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해야 했고 그 사진을 찍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두 번째로 그가 떠오른 순간이었다. 일 년간 우리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취재를 했다. 한창 취재와 기록 정리로 정신없던 어느 날, 일정을 의논하느라 삼청동에서 만나기로 했다.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일정을 이야기하자는 아주 형식적인 코스였다. 차를 마시러 이동을 하면서 삼청동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걷는 내내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주먹 하나 사이의 간격으로 느껴지는 그 떨림을 느낀 순간 속으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근데 왜 그렇게 떨어요? 내가 잡아먹어요?"


우리의 연애는 그렇게 시작됐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도 연애 좀 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