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숙정 Sep 12. 2022

조금 불편한 가난은 없습니다

무대 위에 그려진 생존에 관한 연극 이야기 





'가난'이란 단어는 내게 아킬레스건이다. 폭우와 넘쳐버린 물 때문에 반지하방에 갇혀 죽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나, 유서 한 장과 밀린 월세를 놓고 세상을 떠난 일가족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가슴속에 불덩이 하나가 좁은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다. 헛구역질하며 뱉어낸 불덩이는 세상을 향한 날카로운 논쟁이 되기도 한다. 



'가난'에 얽힌 미담은 처음보다 마지막이 더 씁쓸하다. 가난을 이겨내고 성공을 했다는 성공담은 그러려니 하지만 성공담이 가난은 조금 불편할 뿐이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미화될 때 씁쓸함은 절정에 달한다. 그것은 가난하지만 성공할 수 없는, 성공할 꿈조차 꿀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한 비난이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왜 나아지려 애쓰지 않느냐고, 당신들은 왜 현재 운명을 이겨내려 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한발 더 나아가 가난은 대부분 게으름, 나태함과 등치 된다. 죽도록 열심히 살아도 한 발자국 내딛기조차 힘든 삶이 엄연히 있고, 기댈 언덕이 없어 천국의 계단을 오를 수 없는 삶은 더 많다. 




가난은 조금 불편한 것이 아니라 아주 많이 불편하다.
부당하고 그래서 많이 억울한 상태를
수도 없이 겪게 만드는 것이 바로 '가난'이다. 




느닷없이 찾아온 '가난'은 한 가정을 몰살시키기도 한다. 단란했던 한 가정은 아버지의 사업부도로 풍비박산이 난다. 아버지는 빚쟁이들에게 쫓겨 집을 나가고 엄마는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딸을 남겨 두고 떠나 버린다. 혼자 남겨진 아이는 주위의 온갖 위협과 가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야 했을 것이다. 성장한 아이는 자신을 찾지 않는 아버지를 찾아 한 병원에 자원봉사를 가게 된다. 



뮤지컬 <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의 이야기다. 이 작품은 가톨릭 재단 무료병원에서 반신불수 환자 최병호가 사라진 사건으로 시작된다. 7년 동안 병원에 붙박이로 입원해 있던 최병호는 사고로 휠체어에 의지해 산다. 그런 그가 하룻밤 사이에 사라진 것이다. 그는 그 병원에 자원봉사를 하러 온 한 여학생과 함께 사라졌다. 그 여학생이 바로 아버지를 찾아 병원에 자원봉사를 나온 아이였다. 



이 뮤지컬은 가난한 아버지 최병호와 딸의 이야기이지만 가톨릭 재단 무료병원에 장기 입원 중인 다른 인물들 역시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돈도 없고 가족도 없고 지나간 추억도 없는 사람들이다. 정극이었다면 온통 가슴 아픈 사연에 눈물 콧물을 쏙 뺄 연극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뮤지컬 <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는 오랜 시간 대학로 롱런 뮤지컬로 자리 잡았던 신나고 재미있는 뮤지컬이었다. 



뮤지컬 <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 커튼콜




이 뮤지컬을 보고 있노라면 가난해도 인간성을 잃지 않은 사람들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에 '가난'때문에 아팠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까맣게 잊게 된다. 삶이 고단한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또 다른 뮤지컬에서도 만날 수 있다. 뮤지컬 <빨래>는 쪽방처럼 늘어선 달동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외국인 노동자 솔롱고, 강원도에서 올라와 대학을 가기 위해 돈을 벌고 있는 나영, 평생 병든 가족들을 돌보며 살고 있는 주인집 할머니, 동대문 시장에서 옷장 사하며 혼자 사는 희정엄마. 모두 힘겹게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어떤 식의 접근이 되었건 '가난'은 이성의 저 밑바닥을 훑어 내어 가장 치졸하고 가장 찌질한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게 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렇게도 말한다. 가난한 자의, 가난했던 자의, 가난을 경험한 자의, 가난을 알고 있는 자의 '자격지심'이라고 말이다. 경우에 따라 '열등감'이란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대학 3학년, 그전까지 아슬아슬했던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났다.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자 아버지는 술주정으로 남아 있는 가족들을 괴롭히셨다. 혼자 남겨진 나는 졸업 후 취직하기 위해 입사원서를 들고 회사 건물 앞까지 갔다가 사람들에게 기가 죽어 돌아오는 일이 수차례였다. 가난은 없는 자격지심도 끌어다 쓰게 만든다. 가난은 작은 열등감도 열 배 이상 증폭시키는 힘을 가졌다.  



무대 위에 그려지는 생존에 관한 이야기는 슬프지 않으려 늘 애를 쓴다. 자격지심이나 열등감이 들키지 않게 현실이 아파도 이겨내자고 한다. 때론 '희망'을 이야기하기 위해 가난을 적절하게 사용하기도 한다. 노력하면 '희망찬 미래'가 놓여 있다는 메시지가 나쁠 것은 없다. 가난해도 행복할 수는 있지만 가난해서 행복하지 못한 것이 개인의 게으름이나 나태함으로 결론지어져서는 안 될 뿐이다. 




뮤지컬 <빨래> 2016년 홍광호 캐스팅 커튼콜


매거진의 이전글 이제 '82년생 김지영'을 떠나보내야 할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