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재미있는 책이 아니다
“내가 사흘 동안 볼 수 있다면"
첫째 날에는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해 준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보고 싶다. 이제껏 손끝으로 만져서만 알던 그녀의 얼굴을 몇 시간이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그 모습을 내 마음속에 깊이 간직해 두겠다. 오후가 되면 밖으로 나가 바람에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나뭇잎과 들꽃들, 그리고 석양에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다.
둘째 날에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밤이 낮으로 바뀌는 가슴 떨리는 기적을 보고 싶다. 그리고는 서둘러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박물관을 찾아가서 그동안 손끝으로만 보던 조각품을 보면서 인간이 진화해 온 궤적을 눈으로 확인해 볼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는 보석 같은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하겠다.
마지막 셋째 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 큰길에 나가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볼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오페라하우스와 영화관에 가 공연들을 보고 싶다. 저녁이 되면 네온사인이 반짝거리는 쇼윈도에 진열돼 있는 아름다운 물건들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와 나를 이 사흘 동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다시 영원히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겠다.
위 문장은 헬렌 켈러가 쓴 글이다. 이미 널리 알려진 글이라 아시는 분들이 많을 듯하다. 나는 이 글을 고등학교 3학년 여름 방학 때 처음 읽었다. 학창 시절 내내 거의 꼴찌 수준에 머물렀던 영어를 제대로 공부해 보기 위해 절에 들어가서 한 달간 공부를 한 적이 있다. 한 달 동안 정말 열심히 영어만 공부했고 그 후 점차 영어는 상위권 성적에 속할 정도로 잘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너무 늦게 정신을 차린 탓에 그해에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고 재수를 해서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한 달 동안 내가 한 일이라곤 성문 종합 영어라는 영어 참고서 한 권을 전부 외우는 것뿐이었다. 그 책에는 좋은 문장이 많았는데 그중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문장이 바로 헬렌 켈러의 "Three days to see"였다. 우리말로 "내가 사흘 동안 볼 수 있다면"이라는 뜻이다. 20세기에 쓰인 수필 중 가장 명문장이라고 하는데 시각 청각 모두 장애가 있음에도 그런 문장을 남긴다는 것은 정말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어려운 일이다.
요즘도 아이큐 검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초등학교 때든가 중학교 때든가 정기적으로 아이큐 검사를 했다. 어릴 때 얼핏 들은 기억으로는 내 아이큐는 113 정도였다. 우리나라 성인의 평균 아이큐가 106이라고 하니 거의 그 수준이다. 그러나 세세하게 따지자면 기억력과 이해력은 평균 정도지만 공간 지각력은 평균에서도 한참 미달이라 펼쳐진 종이를 접어 상자를 만드는 테스트는 너무 어려웠다. 공간 지각력이 떨어진다고 해도 건축 관련 일을 직업으로 갖지만 않으면 문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지하철에서 내려 엉뚱한 출구로 나오는 등 길을 못 찾아 헤매는 경험은 한두 번이라면 모르지만 매번 반복되면 짜증을 넘어 겁이 나기도 한다. 이건 집안 내력이라 어머니도 그렇고 나를 가장 많이 닮았다는 막내딸도 그렇다. 막내는 학원에서 오다가 집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바람에 한밤중이나 되도록 오지 않아서 아이가 없어졌다고 난리가 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기억력을 포함하여 아이큐가 뛰어나게 좋지도 않은데 어떻게 의과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있다.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나은 것이 하나 있다면 그건 집중력 혹은 지구력이다. "나는 돌머리다. 돌에는 글을 새기기는 어렵지만 한번 새기면 안 지워진다."는 것이 학창 시절에 내가 위안을 삼은 지침이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 방학이라는 소중한 기간을 수원의 어느 절에서 보내게 된 당시의 심정은 오래되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이대로 흐지부지 학창 시절을 마무리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마라톤 풀코스를 다 뛰고 났는데 힘이 남아 있는 것처럼 멍청한 일을 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당시 대학교 다니는 아는 형님에게 부탁하여 고시생들이 공부하는 절을 소개받았다. 수원 외곽에 세마대라는 정자가 있는 조그마한 산의 중턱쯤에 있는 절이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절은 여러모로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절이다 보니 식사도 나물 위주로만 먹었다. 그때 그 절의 스님은 혼자 버터를 밥에 발라서 먹고는 했는데 많이 부러웠던 기억이 난다. 어느 날은 절에서 키우던 흑염소가 병에 걸려서 죽는 바람에 흑염소를 삶아서 다 함께 먹었다. 그것이 태어나서 제일 맛있게 먹은 고기였다. 나야 좋았지만 불가에서 육식은 금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 스님은 좀 특이한 스님이었던 모양이다.
여하튼 지금도 내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고 밀도 높게 살았던 기간을 꼽으라면 그때를 꼽는다. 그 후 힘들다는 의과 대학 공부를 할 때도, 전쟁터와 같은 산부인과 전문의 수련을 할 때도, 별 보고 출근했다 별 보고 퇴근하는 종합병원 생활 때도 그때만큼의 절실함은 없었다.
하루하루는 그저 왔다가 가는 어느 날이었고 마지막인 것과 같은 치열함을 품지는 못했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건강한 신체, 혹은 당연한 것처럼 주어지는 하루하루의 소중함을 잘 모른 채 산다. 그러다가 대학병원에 산부인과 전공의 4년 차로 근무할 때 만났던 어느 산모가 그런 당연한 것들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게 해 주었다.
4년 차인 수석의로 산과 병동에 근무를 하던 때 일이다. 어느 날 외래를 통하여 한 산모가 입원했다. 문제는 산모가 척추 후만증, 즉 민간에서 흔히 쓰는 말로 꼽추라고 부르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앞으로 심하게 굽은 척추 후만증은 가슴과 골반이 매우 좁다. 따라서 자연 분만은 거의 불가능하며 제왕절개 수술을 해서 출산을 해야 한다. 다만 척추 후만증이 심하면 폐와 심장도 제대로 발달을 못해서 심폐 기능도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 팀이 맡게 된 산모는 척추 후만증이 매우 심하여 심폐 기능이 정상인의 20% 밖에 되지 않았다.
수술을 앞두고 마취과와 내과에 협진을 요청하였다. 심폐 기능이 너무 떨어져서 전신 마취는 위험하여 할 수가 없다는 답신이 왔다. 그렇다고 하반신 마취도 할 수가 없었다. 하반신 마취를 하려면 척추에 바늘을 꽂아 척수강으로 마취약을 투여해야 하는데 척추 협착으로 마취 바늘을 삽입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유일하게 가능한 마취는 국소 마취뿐인데 국소 마취는 내부 장기의 마취는 불가능하고 간단히 피부 정도만 마취할 수 있는 마취 방법이다. 그러므로 국소 마취를 한다는 것은 마취 없이 거의 생으로 수술을 한다는 말과 다름없다. 중세 시대라면 모르지만 지금 세상에 마취도 없이 하는 제왕절개 수술이라니..... 결국 산모의 팔다리를 단단히 묶고 한계 용량에 가까운 많은 양의 국소 마취제를 사용하여 간신히 수술을 마쳤다. 산모는 수술로부터 어느 정도 회복하는 듯했지만 수술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몸이라서 며칠이 지나면서부터 심부전증의 소견이 나타났다. 여러 치료에도 불구하고 결국 산모는 한 달 후에 사망하고 말았다. 심부전증이 나타나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게 되었을 때 산모는 결국 예상하던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리 놀라지도 않았다. 다만 좀 더 오래 살아서 건강하고 우렁차게 우는 아기를 마음껏 안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헬렌 켈러가 단 3일만이라도 눈을 떠서 하고 싶었던 일이 그 산모에게는 아기와 함께 보내는 일이었다. 여러 치료에 시달리느라 산모가 마음 놓고 자신의 아기를 안아 보고 행복에 겨워한 날은 불과 며칠밖에 되지 못했다.
헬렌 켈러가 눈을 뜨게 된다면 보는 나뭇잎과 들의 꽃들, 별과 영화는 장애가 없는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척추 후만증 산모가 그렇게도 품에 안아 보고 싶었던 아이는 내 아이들이나 당신의 아이들과 다른 아이가 아니다. 다만 헬렌 켈러나 그 산모는 그것이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나처럼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면서 사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권총 자살로 37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붓을 손에 든 이후부터 죽기까지 그는 단 하루도 화가가 아닌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살아생전 자신의 그림을 단 한점 밖에 팔지 못했다. 친구의 동생이 그의 "아를의 붉은 포도밭"을 사준 것이 유일하다. 그럼에도 그는 죽는 날까지 평생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다. 동생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아서 그림을 그리느라 항상 돈에 쪼들렸다. 모델을 구할 돈도 없고 여행을 다닐 형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그린 그림은 집이나 병원 주변 풍경이나 자신을 모델로 한 그림뿐이었다. 고흐의 마지막 작품은 “까마귀가 나는 밀밭”으로 알려져 있다. 마지막 날인 것처럼 매일을 살았던 고흐지만 그래도 죽기 전에 아쉬움 없이 자신의 모든 에너지, 모든 물감을 쏟아부으려는 듯이 그의 그림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그림이다. 보통 사람들이 고흐나 헬렌 켈러처럼 자신의 삶에서 하루도 소홀함이 없이 살아 있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면서 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삶의 어느 한때만큼은 정말 죽도록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는 경험 하나쯤은 가지고 살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쓴 술에 달콤한 안주처럼 고단한 인생에 뿌듯한 추억은 삶을 버티는 데 큰 힘이 된다.
-여기 실은 그림-
빈센트 반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