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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le Cactus Jun 17. 2024

12화 황혼에서 새벽까지

나무잔의 진실

‘고마워요’

여자는 차문을 열며 고마움을 표시한다. 엠마는 술에 찌든 게리와 안나를 부축해 차에 실는다. 엠마는 에디의 딸로 하버드에서 법을 공부하는 법대생이다.  큰 눈의 곱게 땋은 머리는 에디와 판박이이다. ’ 아빠 가자’ 에디가 꼼짝을 못 한다.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엠마가 글로브박스에서 스카프를 꺼내 건넨다. 놀란 눈을 한 여자가 붉게 부어오른 목에 매만지다 얼른 동여맨다.

‘오늘은 다들 우리 집에서 자고 내일 다 같이 출근하자고’

이른 새벽엔 도로가 한산해 금방 도착했다.

술이 깨기 시작한 게리와 안나를 부축해 들어간 집엔 리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키가 작고 깡마른 리나는 빠르게 취객을 소파로 옮겼다.

‘엄마’

스파이더맨 캐릭터가 프린트된 잠옷을 입은 남자아이였다.

난감한 표정의 리나가 나와서 아이를 데리고 사라졌다.

돌아온 리나가 미안해했다.

‘아니에요. 일하시는 분 아이인걸요 ‘

‘전 인디언가족이에요’ 에디의 부인을 알고 있는 여자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엠마를 쳐다본다.

‘새엄마가 아니야. 리나는 외부남자와 결혼해서 살았거든 근데 어느 순간부터 변하기 시작했지 ‘

‘외부남자?’

‘인디언이 아닌 남자는 외부사람이라고 부르지.’


’갑자기 일을 안 나가고 외박을 하기 시작했어요. 나중에 알았지만 도박은 물론이고 마약이랑 성매매도 했더라고요.‘

리나가 여자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한다.


‘모든 걸 용서하면 변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인디언이 아닌 남자와 결혼했으니 더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바보 같은 생각이죠. 이해해 줄수록 작은 일에도 화를 내서 맞춰줘야 했어요. 자기 아들에게 손을 대는 것을 막아서니 칼로 위협했죠.‘

충격적인 고백에 여자는 얼어붙었다.


‘뭐 좀 마실래요?‘ 리나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물었다.

‘난 콜라로 줄래요?‘ 얼어붙은 여자를 대신해 엠마가 대답한다.

리나는 콜라와 얼음컵을 가져다주고 사라졌다.

엠마는 가져온 얼음을 컵에 담고 콜라를 땄다.

’ 신고는 했어요?‘ 콜라를 따르는 엠마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원한다면 변호사 번호를 줄게요.‘

여자는 스카프를 매만졌다.


‘이제 자야지’

에디가 이불을 들고 나타난다. 인디언문양의 이불을 게리와 안나에게 차례로 덮어준다. 에디를 따라가자 게스트룸에 도착한다.

‘집처럼 생각해 필요한 물건은 리나에게 부탁하면 바로 갖다 줄 거야, 내일아침 7시에 출발‘ 여자가 대답도 하기 전에 에디는 사라졌다.


게스트룸에 딸린 화장실로 들어가니 제법 크다.

모자와 스카프를 벗어 멍든 목과 얼굴을 살핀다.

빨갛게 멍든 목에 얼굴 곳곳에 핏자국이 난무한다.

물을 틀어 스카프를 물에 적시자 손이 찌릿하고 아프다.

찢어진 손에선 상처가 벌어져 피가 조금 고여있다.


‘여기 얼음물이랑 수건 좀 가져왔어요 ‘

리나가 트레이를 들고 서있다.

‘고마워요 ‘

얼굴을 가리고 싶지만 가릴 것이 없는 여자는 시선을 피한다.

리나가 트레이를 내려놓고 묻는다.

‘저기 주말에 시간 있어요?’





Summer Picnic

알래스카 공원은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다. 예약만 한다면 행사를 위해 사용할 수도 있다. 햇빛이 좋은 날은 예약이 쉽지 않기 때문에 6개월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올해도 인디언과 소수민족을 위한 여름피크닉이 열렸다. 올림픽과 마찬가지로 차량대절이 가능해서 신청만 하면 행사장까지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다.  몸이 불편하거나 고령자들도 적극 참여하는 행사이다. 보통 이틀 동안 행사가 진행된다. 초기엔 소수민족과 인디언만 참여했지만 부대비용이 늘어나며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  기부금을 위해 티켓을 판매했고 비용을 충당하며 지역구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첫째 날엔 티켓이 가장 많이 팔리는데 인디언과 소수민족의 전통 음악과 춤, 무술을 선보이기 때문이다. 기부금을 조금 더 낸다면 다양한 전통음식 뷔페도 맛볼 수 있다. 몇 해 전부터 합류한 푸드트럭들은 주로 입구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민자로 이루어진 푸드트럭 주인들은 전액 기부하거나 일부를 기부하는 조건으로 참여하고 있다.

‘여기예요 ‘

화려한 전통의상을 입은 리나가 손을 흔든다.

깃털장식과 타투 가득한 몸은 신비로워 보인다.

작은 몸집의 그녀 곁에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열댓 명의 얼굴과 몸엔 저마다 다른 타투가 가득했다.

‘이게 너의 전통의상이야?‘

‘하하 미국의상이지’

부츠컷청바지에 부츠를 신은 여자는  강한 바람에 모자를 푹 눌러쓴다.

‘전통의상은 안 입어?‘

‘한복이라고 하는데 입어본 적이 없어.‘

여자를 신기하게 쳐다보다 이내 손을 잡아끌었다.

전통무술공연을 보고 전통주를 마시며 음식을 나눠먹었다.

밤이 깊어가고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다.

그녀들을 따라 숲으로 향했고 어둡고 좁은 길을 따라간 곳엔 요새처럼 텐트사이로 커다란 불길이 솟아있었다. 불 주위의 나무에 앉았다.

투박한 나무잔을 전달해 준다. 잔은 받아 든 여자는 가만히 컵을 바라본다.  텅 비어있었다. 화려한 깃발장식을 한 남자가 뜨거운 물을 리나의 잔에 따라주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불빛사이로 김을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 나의 남편은.. ’ 리나가 말했다.

그녀가 남편을 만나고 연애한 이야기, 가족들을 배신하고 동거한 이야기와 결혼 후 남자의 변화를 무시한 이야기가 이어졌고 절망에 눈을 감았다. 모든 말이 끝난 그녀는 잔을 들이켰다. 다음 여자도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가 끝나고 차를 마셨다. 여자의 차례다. 모두의 시선에 주춤하던 여자는 사냥명상을 떠올렸다. 혼자 숲 속에 앉아있는 자신을 상상하며 눈을 감았다. 쪼르륵 따뜻한 물이 여자의 컵에 따러졌다.

‘나는 그 사람을 믿었어. 그는 순수하고 나만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지. 하지만 나를 위해 포기하는 법이 없었어. 작은 것 하나 그의 맘에 들지 않으면 들어줄 때까지 나를 무시하고 함부로 하고 괴롭혔어. 나는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어.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만 입 다물고 있으면 나를 내버려 둘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의 마음에 거슬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어. 왜 그렇게 노력했을까 생각해 보면 어릴 때얘기를 해야 하는데… 어릴 때 생부가 나를 밀어냈을 때 나는 죽었다고 생각했어.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죽은 거였어.  죽어있던 나에게 새아빠가 나타나며 너무 기뻤어. 나를 사랑하고 구해줄 구세주로 생각했으니깐… 그가 죽은 후엔 더 쉬웠어. 우연히 만난 그 사람이 새아빠를 대체했지.  

하지만………사실은 그들의 잘못이 아닌 것을 알아. 처음부터 그들은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고 나는 혼자가 되어도 되고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게 됐어.

나를 지키지 못하고 나를 사랑하지 않은 내 탓이란 걸 알아. 이젠 알아 ‘

붕대감은 손을 가만히 바라보던 여자는 차게 식은 차를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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