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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레트 Aug 28. 2022

[김녕로] 곁을 내어주다

-내 것이 아닌 ‘여유’를 갈망하다.

내 건데 왜 갈망해? 너 부자들이 명품 갈망하는 거 봤어? 그냥 사지. 내가 뭔가 죽어라 갈망할 땐 저 깊은 곳에서 이미 영혼이 알고 있는 거야. 내게 아니라는 걸.
-나의 해방 일지


드라마 속 이 장면을 볼 때, ‘나에게 여유가 그런 걸까?’라고 생각했다. 20대 초반. 알바를 2개씩 하면서도 과탑을 유지하기 위해 수없이 밤을 새웠다. 병간호 때문에 휴학하면서도 바쁨을 놓지 않았다. 20대 중반. 자격증이든 공부든 알바든 심지어 누구를 만나는 것까지 한 달이라는 시간을 철저히 계획하고 저장했다. 하루를 가득 채우고도 넘쳐야만 내가 살아가는 것 같았다. 아마도 바쁨은 내 마음속 불안을 가리기 위한 가리개였다. 불안은 나를 무엇으로 만들지 못했고, 29살에 엄마가 되었다. 쥐고 있던 바쁨은 온전히 아이에게 쏟았다. 예민한 아이라는 틀에 가두고 모든 시간을 아이에게 맞췄다. 나의 잘못으로 아이가 바르게 크지 못할까 늘 불안해하며, 여유 없이 바쁜 엄마로 살았다.     


제주는 시간 부자들이 많아 여유가 장점이라 했다. 늘 바빴던 나도 제주에 와서 시간이 많아졌으니, 어쩌면 나도 시간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 일생에 여유란 것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은 느긋하고 차분하게 생각하거나, 대범하고 너그럽게 일을 처리하지 못한다. 아무도 나에게 시간 허비하지 말라고 하지 않는데 꼭 틀어진 라디오로 듣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은 정작 일을 더 할 체력도 없으면서 돈을 쓰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계획은 다이어리 가득 채워 세우고, 실천하기도 전에 지쳐버린다. 일러스트, 포토샵, 글쓰기 강의를 듣고 또 시간이 남으면 병원에 다닌다. 쉬는 시간에 쉬지 않으면서, 제주에 와서 시작한 일이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직장에서는 "일을 더 줘도 괜찮다."라고 말하면서, 상담가에게는 "일하는 게 힘들다."라고 했다. 상담가는 나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답했다. 너무 ‘열심히’ 살려고 하지 말라고. 속으로 ‘어쩜 그렇게 무책임한 말을 쉽게 할까? 평생을 열심히 산 사람에게 열심히 살지 말라는 건 내가 나를 부정하라는 말이잖아.’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 그 말은 ‘나의 상태를 인정하세요.’라는 말이었을까,라고 재해석했다.

나의 상태는 여전히 불안하고, 불안을 가릴 바쁨이 필요하다. 시간적 여유를 가져도 마음에서 그 여유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여유를 가질 만한 여유가 없다. 



친구따라 김녕가다


제주에 이사 온 지 세 달쯤 되었을 때, 친한 친구가 놀러 왔다. 자신이 잘 아는 곳에 숙소를 예약했다며 우리를 초대했다. 김녕 바닷가 근처 조용한 동네였다. 친구는 걷다 우연히 만난 바닷가에 발을 담그고 고동을 잡았다. 유명한 곳을 찾아가지 않았다. 시계나 일정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노을을 보기도 했고, 바람을 느끼기도 했다. 아이들은 아무도 없는 밭담 길에서 돌을 뒤적거려 공벌레를 잡았다. 파란색 바다와 함께 있으면 검은색 돌도 색깔이 참 예뻤다. 밭담 길과 함께 본 장면은 눈에 오래도록 남았다.

맛있는 음식이 기분을 좌우하는 친구라, 가고 싶은 식당에 가기 위해 1시간을 대기했다. 기다리는 동안 동네 길을 구석구석 걸어 다녔다. 배가 고팠지만, 그 길이 배고픔을 이길 만큼 아름다웠다. 특별한 건 아니지만, 한적했고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안정을 주는 길이었다. 좁은 길옆으로 초록색 넝쿨, 오래된 나무, 검은색 돌담과 민트색 지붕, 깨끗한 하늘이 완성시키는 평화가 있었다. 아침에는 아이들과 가위바위보를 하며 기다린 빵집에서 갓 나온 소금 빵을 먹었다. 소금 빵이 맛있어서 짜증이 났다. 지나고 보니 그 짜증은 이런 것이었다. ‘맛있는 거 먹으면서 웃으면 안 되는데.. 그렇게 가벼운 마음이 아니란 말이야.’


제주에서 제주 사람이 아닌 친구가 여유를 선물했고, 나는 그 선물을 열어보고 웃어 보였다. 나는 지금까지 “제주에서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라는 질문에 “김녕 마을에 길을 걸었는데, 그 길이 참 예뻤어요.”라고 답한다. 겨우 지금에서야 알아차렸지만, 아마 나는 여유를 선물 받은 김녕 길가에 잠시나마 내 마음의 곁을 내어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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