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윤숙 Apr 21. 2021

‘여밈’이라는밈(MEME)

따뜻한 밈(MEME)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길

 어린 시절 한 장면이 눈에 스칠 때가 있다. 뛰어놀다가 넘어져 무르팍에 피가 날 때, 빨간약을 들고 뛰어오던 엄마나 이웃 아주머니들의 모습 같은. 또 있다. 어릴 적 부모님이 이불을 여며주시던 장면이다. 요즘은 아파트가 일상적이지만, 예전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허술하게 지은 주택에 살았다. 난방으로 아궁이에 연탄을 땠는데, 바닥만 뜨겁고 위는 외풍이 심해서 추웠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면 코가 빨갛게 얼어 있기도 하고, 손을 내놓고 자면 손등이 텄다. 아이들은 자다가 종종 이불을 차냈는데, 부모님들은 잠을 설쳐가면서 아이들의 이불을 여며주셨다.   

   

 형제들 중에서도 특히 내가 자다가 이불을 많이 차냈나 보다. 아빠는 밤에도 수시로 이불 양쪽을 안으로 단단히 여며주고 가셨다. 그 걸 내가 알고 있는 걸 보면 주로 깨어 있었나 보다. 그런데도 아빠가 왔을 땐 자는 척 연기를 했다. 아빠를 놀리는 재미도 있었고, 드라마에서 그럴 때 눈을 감고 있는 게 더 멋이 있어 보였으니까. 아빠도 알고 계셨다. 과장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유. 잘 자네. 그래도 이불은 차내지 말아야 해. 감기 걸릴라." 그때마다 팔 안쪽 근육이 찌르르 떨리는 느낌이 들었다. 어린 마음에도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내가 온전히 사랑받고 있구나. 누군가 나를 챙겨주고 있구나.’라는 것을.    

 

 딸만 다섯 가진 아빠는 남들에게서 팔불출 소리를 들어가며 '딸 바보'를 자처하셨다. 그 당시 아빠의 딸 사랑은 대단했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퇴근 시 간식을 사 오신 아빠. 그것도 반드시 아침에 아이들이 주문한 것으로. 하루는 내가 사과를 사 오랬는데 늦게 퇴근하시느라 가게가 문을 다 닫았던 모양이다. 그러자 빈손으로 집에 돌아오시는 게 마음이 무거우셨다. '아이들이 사과를 먹고 싶다고 했는데.'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우리가 잠들면 집에 들어오시는 거다. 마침 추운 겨울이었다. 그런데 아빠를 기다리던 우리들이 잠을 안 자고 눈이 말똥말똥했던 거다. 엄마가 그냥 들어오라고 하셨는데도 대문 밖에서 떨고 계시던 아빠. 나중에 엄마가 말씀하시길 무척이나 눈물겨운 장면이었다고.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아빠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것 같다. 어린아이들과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해하는 아빠. 그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은 내게 '아빠'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표정이다. 그 외에도 아빠가 아이들의 동심을 지켜주기 위해 했던 행동은 무수히 많다. 덕분에 나는 평생 마음을 잘 챙기고 살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에겐 여며주어야 할 대상이 생겼고, 내가 여밈을 받기는 힘들게 되었다. 이제 ‘이불 여며줌’이야 필요 없지만, '마음 여며줌'은 눈물겹도록 그립다. 그리고 아빠가 밤새 이불을 여며주던 시절, 그 따뜻함이 여전히 내 세포 속에 살아 숨 쉬는 걸 느낀다.     

 

그 '여밈'은 밈(DNA에 빗대어 말하는 문화적인 전달물질)에 의해 전달되어 이제 우리 아이들이 혜택을 본다. 난방이 잘 되어 있는 요즘은 굳이 이불을 여며줄 일이 없다. 그런데도 밤에 잠을 자는 아이들 방에 슬며시 들어간다. 불을 켜고 자지는 않는지, 이불을 차 내진 않는지. 어제는 딸아이가 밤새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기침 한번 할 때마다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밤새 딸아이 방을 들락거렸다. 기침 시럽을 먹여보고 가습도 해보고. 그래도 기침이 멈추지 않아서 한숨을 내쉬다 방을 나오려는데, 자는 줄 알았던 딸아이가 양팔을 올리며 힘없이 말한다. "엄마. 안아줘." 


이때 딸아이를 안아주면서 아빠가 이불을 여며주실 때 느꼈던, 파르르 팔 안쪽의 경련이 다시 찾아왔다. ‘이제는 내가 누군가를 여며주고 있구나.’ 하며.     

 

가슴 설레어 꿈꾼다. 어린 시절 ‘이불 여밈’ 같은 따뜻함이 새로운 밈(meme)처럼 우리 사회에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라고. 지금보다 조금만 더 챙겨주고, 다들 조금만 더 따뜻하게 말하면 어떨까 하고. 그래서 결국 ‘이런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택배기사들이 과로사하지 않는 사회. 누구든 밤늦게까지 일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젊은이들이 위험한 데서 일을 하다가 사고가 나는 일이 없는 사회. 전화로 응대하는 안내원들에게 따뜻하게 말하는 사회. 청소노동자들에게 지속적인 일자리가 마련되는 사회. 그래서 결국 몇 명만이 아니라 모두가 행복한 사회.’                

작가의 이전글 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